소믈리에 자격증, 실력과 간판
"형.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예요?"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상균교수가 물었다.
"미국에서 골프 티칭프로에 합격한 순간."
"네?"
2010년 11월 USGTF 티칭프로 테스트 마지막날. 3타의 여유를 가지고 파 5 18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랐다. 양쪽 모두 OB 말뚝이 있고, 페어웨이가 아주 좁아 보인다. 순간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에 들어온다. 이 샷이 OB가 되면 어쩌지?
미리 대비해 두었다. 평소대로 자세를 잡고, 우리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모습 한번 떠올리고 바로 스윙. 다행히 공은 가운데로 갔고 100미터 지점에서 세 번째 샷을 준비. 웨지로 친 샷이 그린 한복판으로.
퍼팅을 다섯 번 해도 되니 이젠 합격이다.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속에 폭신한 잔디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가던 100미터. 정말 행복했다. 내게는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였고,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해서 이룬 결과였다.
그런데 당시 골프아카데미를 같이 다니던 동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 배우는 것도 없는데 많은 돈을 내면서 왜 티칭프로 자격증을 따느냐고. 미국은 실력이 중요한 사회지만 한국은 간판이, 자격증이 더 중요한 사회라고 대답해 주었던 것 같다.
최근 르꼬르동 블루에서도 비슷한 토론이 있었다. CMS라는 가장 크고 유명한 소믈리에 단체의 자격증을 딸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은퇴한 미국내과의사 토머스는 역시나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여기 교육과정이 훨씬 좋은데 뭐 하러 돈과 시간을 낭비하냐고. 소믈리에는 자격증보다 실력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 같은 미국인이라도 사업을 해본 친구들은 다른 의견이다. 졸업장이나 경력도 중요하지만 시험을 통한 자격증이 현장에선 더 인정받는다고.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간판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우리가 사람의 실력을, 상품의 품질을 평가하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지니까. 와인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결국 라벨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나 역시 간판 덕을 많이 본 사람이다. 20년 전에는 병원에 가면 무조건 주사를 맞아야 하고 약도 많이 복용할수록 좋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했다. 주사 전혀 놔주지 않고 감기에 항생제 절대 쓰지 않으면서도 내과의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건, 서울의대를 나왔다는 내 간판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