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에 떠나는 파리 유학 10

부르고뉴 체험학습

by 신경한

르꼬르동 블루 와인 과정의 1년 학비는 3천만 원이 넘는다. 상당히 비싸지만 그만큼 내용은 알찬 것 같다. 학교 안팎에서 많은 시음을 할 수 있고, 2박 3일간 모든 경비가 포함된 5번의 현장학습이 있다.

보통 하루에 3군데 와이너리를 방문하여 포도밭과 와인제조 과정을 직접 보며 수업 중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고, 평균 8-10 종류의 와인을 시음한다. 점심 저녁은 학교 셰프들이 추천한 레스토랑에서 그 지역 음식과 와인 페어링을 공부(?)한다.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를 모두 돌아보는데 부르고뉴는 모두가 기대하는 곳이다.


이번 부르고뉴 와인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모레 생드니 지역의 그랑크루 와이너리 클로 드타르 (Clos de tart). 맥심 선생님이 인맥을 총동원해서 예약했다고 한다. 올해 우리 인원이 적어서 가능했다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입구를 지나 포도밭에 서서 클로 드타르의 친환경 양조철학을 듣는다. 포도밭 중간중간에 나무를 심어서 뿌리가 서로 얽혀 상생하도록 하고 근처 새들과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한다고. 또한 친환경은 방치가 아니라 더 세밀한 관심이라고 이야기한다. 포도밭 곳곳의 토양 성분을 주기적으로 측정하여 부족한 영양분은 친환경 방법으로 보충한다고.


지하 셀러에서 와인 발효와 숙성 과정, 먼지 싸인 오래된 빈티지 와인을 살펴보고 2층 시음실로 이동했는데 뷰와 실내 장식이 너무 멋지다. 시음하는 와인잔도 최고급. 먼저 프리미어 크루인 2023년 la forge de tart를 시음하는데 우아함과 밸런스, 복합미가 훌륭하다. 그리고는 내년에 수백만 원 가격으로 출시될 2023 그랑크루 Clos de tart. 강한 탄닌으로 오랜 숙성을 해야 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걸로 유명했는데 요새는 일찍부터 즐길 수 있도록 조금 부드럽게 만든다고. 역시 너무나도 좋다.


지난 2달 동안 많은 와인을 시음하다 보니 이젠 좋은 와인을 좀 구별할 수 있다. 먼저 코로 맡는 향보다는 와인을 마시거나 뱉은 후 목에서 코 뒤로 올라오는 retronasal aroma가 품질을 평가하는 데 있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입 안에서 타닌과 산미, 맛과 향이 따로 놀지 않고 잘 얽혀있는지도 중요. 창 밖의 포도밭과 파란 하늘을 보면서, 만약 허름한 장소에서 똑같은 와인을 마신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온몸에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을 것도 같다.


둘째 날 저녁에 조지가 하루 동안 거의 50종을 테이스팅 하는 건 무리라고 불평한다. 비슷비슷한 와인을 계속 시음하니 마지막엔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고. 다들 빡빡한 시음 스케줄에 불만인 듯해서 내가 끼어들었다.

와인 시음과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일종의 스포츠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비디오게임이 E스포츠인 것처럼. 규칙과 경쟁이 있고, 기술도 필요하니까. 우린 훈련하고 있는 초보 운동선수이니 당연히 쉽게 지치고 힘들 수밖에.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집중력과 와인 근력을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맥심이 아주 흐뭇한 미소를 보낸다. 점심때 내가 좋은 와인을 사서인지 학생들도 다들 수긍하는 눈치.


셋째 날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샹트네 지역의 샤토 드라크레. 부르고뉴에서 좀 덜 알려진 곳이라 가성비가 훌륭하다고 한다.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인 켄이 직접 와이너리와 시음할 6종의 와인을 소개해준다. 모두 개성이 뚜렷했다. 마지막은 오스피스 드 본 2018 본 프리미어 크루, 반갑다. 사실 9월 초부터 미국의사 토머스와 함께 11월 세 번째 주말에 열리는 오스피스 드 본 경매에 참여해 보려고 많이 알아봤었다. 수익금은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는 165년 역사의 자선 경매. 라벨에 주문자의 이름이 들어간 와인. 세금과 주류 수입 등이 아주 복잡해서 결국 우리가 포기한 와인을 마지막에 시음하게 되는구나. 역시 와인 라벨에 켄과 아내인 그레이스의 이름이 적혀있다. 경매를 통해 오크통째 구입한 거라 당연히 100% 뉴 오크 숙성이다. 와인은 아주 훌륭한데 내게는 오크가 너무 지나친 느낌. 이래저래 오스피스 드 본은 나랑 인연이 아닌 듯하다.


밖으로 나오니 포도밭도 정원도 단풍이 예쁘게 들었다. 파리는 주로 노란색 단풍인데 여기는 붉은색과 함께 울긋불긋. 어머니가 낙엽을 모으고 계셔서 몇 개 주워갈까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문득 'Where the clawdads sing(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주인공 카야의 말이 떠오른다.


“Autumn leaves don't fall, they fly. They take their time and wander on this their only chance to soar.”


지금 이 순간과 너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면적인 내용도, 속 깊은 의미도. 인생의 내리막길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나이 50을 넘어선 우리 중년들에게. 가을 나뭇잎은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잠깐 쉬면서 날고 있다고. 그리고 다시 한번 힘차게 날아오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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