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중반에 떠나는 파리 유학 12

이동성 임대 mobility lease

by 신경한

파리 유학을 오기 한참 전부터 지낼 집을 알아보았다. 물가가 비싼 파리에서 6개월을 지내야 하기에. 허리가 안 좋으니 침대는 딱딱한 게 좋겠다. 가족들이 올 거라 소파베드도 있으면. 학교와 가깝고, 겨울이니까 남향. 에펠탑 뷰는 안 될까?


출발 5개월 전 에어비앤비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고는 바로 계약했다. 처음 보는 이동성 임대라는 계약인데 취소 시 30일간의 숙박료는 환불 불가능 조건이었다. 파리에 도착해 보니 집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사진에서 본 것과 거의 똑같았고, 무엇보다 베란다에서 보는 에펠탑 뷰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10월 10일 임대업체에서 메일이 왔다. 집이 팔렸다고 한 달 내로 집을 비워 달라고. 내가 에어비앤비에서 취소 신청을 하면 환불과 200유로를 추가로 주겠다고. 뭔 소리. 2주 전 매매를 위해 집을 좀 보여주고 싶다고 했을 때 2월까지 내 숙박은 전혀 관계없다고 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냥 미안하다고만.


마음이 무거워진다. 학교 수업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가족들이 돌아가며 올 텐데 집을 다시 알아봐야 하나. 근데 내가 외국인이라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15년 전 미국에서는 더한 경험을 했다. 팜스프링스 여행에서 빌린 집 벽난로의 과열로 화재가 났다. 내 과실이 없는 게 명확한데도 보험회사는 나에게 구상권을 청구. 해결될 때까지 거의 3개월 간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내 잘못도 없는데 왜 이런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지,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너무 억울했다.


그런데 차분히 생각해 보니 'Why not me'. 낯선 나라에 정착한 이민 1세대 중 이런 억울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나는 물어볼 변호사도 있고 어떻게든 마련할 수는 있는 금액이고, 정 안되면 바로 미국을 떠나면 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게, 내 편이 있다는 게 아주 큰 위안이었다.


다행히 요새는 AI가 큰 도움이 된다. 파리에서의 내 상황을 챗지피티 무료 버전에 물어보았더니 핵심만 뽑아서 잘 설명해 주었다. 내가 계약한 이동성 임대는 집주인이 절대 해지할 수 없다고. ADIL에서 무료 법률 조언을 받을 수 있고 압박이 계속되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한다. 한국에 있는 후배를 통해 알아본 프랑스 변호사 역시 똑같은 조언을 했다.


그러나 압박은 계속되었다. 당신들은 계약을 취소할 권리가 없다는 내 질문에는 직접적으로 답변하지 않고 담당 직원과 매니저가 계속 문자를 보냈다. 대표는 저녁에 직접 집으로 찾아와서 어떻게든 해결해보자고 한다. 11월 10일까지는 꼭 비워줘야 한다고. 보상금을 더 주겠다고.


많이 두려웠지만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이 계약을 취소했다면 30일간의 숙박료를 날려야 하니 당신들 역시 같은 금액 더하기 이주비를 보상금으로 주고, 내가 집 구할 시간을 2주 이상 보장해 준다면 고려해 보겠다. 아니면 더 이상 연락하지 마라. 내가 엄청 스트레스받고 있고 내겐 스토킹처럼, 정신적인 폭력처럼 느껴진다고.


무엇보다 이 회사의 일처리를 믿을 수 없었다. 에어비앤비나 다른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사실 르꼬르동 블루에 다니는 여러 친구들도 집 문제로 골치 아파하고 있다.


이틀 후 대표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가 2월 말까지 거주하는 걸로 집을 구매한 사람과 합의를 했다고. 파리에서 좋은 시간 보내라고.


그래, 이 정도면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난 종교인은 아니지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시련을 주신 것에.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 겸손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해 주신 것에. 그리고 브런치 스토리 글감을 주신 것에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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