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니쉬, 감각일까 기억일까
"품질 좋은 사케는 시원한 계곡물을 마시는 것처럼 피니쉬가 짧습니다."
사케 마스터 클래스에서 멘토인 자비에가 말한다. 최근 호텔 크리옹 수석 소믈리에를 사직했는데 그 내용이 피가로 신문에 실릴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다.
음료를 마시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적이 세 번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로마네 콩티 1945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비싼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피노누와 와인. 와인 애호가 모두의 버킷 리스트일 것이다.
두 번째는 프랑스 쥐라 지역의 뱅 존 (vin jaune) 1799년. 사바냥이라는 포도로 천천히 산화시키며 주조하는 와인이라 장기 숙성이 가능하다. 그래도 200년이 넘은 와인이라니. 대단하다. 무슨 향과 맛이 날까?
세 번째는 술이 아니란다. 일본 교토 후시미 지역에서 사케를 만드는 물을 마셨을 때.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아 마셨는데 그 순수한 맛에 눈물이 났다고 한다. 그 물의 순수함을 살리는 게 그곳 사케의 양조 목표라고. 그 사케를 마신 후 물을 마신 것처럼 짧은 피니쉬를 느꼈다고 한다.
올 6월 일본 야쿠시마 섬 트레킹이 생각났다. 50대 남자 셋이서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원시림 속에서 3박 4일을 보냈다. 조몬스기 삼나무도 만나고 야외 해수 온천에서 비도 맞아보고. 그때 산속 계곡에서 마신 물이 떠올랐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과 콸콸 쏟아지는 계곡소리. 이끼 낀 바위 사이에서 대나무관을 통해 나오던 물. 사실 맛은 기억나지 않고 그 순수하고 청량한 느낌만 남아 있다.
그때 야쿠시마에서 도쿄로 이동해서 주욘다이라는 유명한 사케를 시음했다. 멸균 과정을 거치지 않아 효모가 살아있는 생 사케. 향이 아주 복합적이고 피니시도 상당히 길어서 와인과 사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자비에에게 질문을 했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며 피니쉬의 차이가 멸균 유무에서 오는 건 아닌지. 그럴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좋은 와인은 모두 피니쉬가 길지만 좋은 사케는 피니쉬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한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피니쉬가 모두 감각이라고 생각하는지. 강렬한 감각의 기억은 아닌지. 자비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피니쉬는 감각 플러스 기억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피니쉬는 주로 retronasal aroma, 와인을 마신 후 목 뒤에서 코로 올라오는 향에 의한 것인데 감각이 오래가는 건지, 기억이 오래가는 건지 우리가 구별할 수는 있는 걸까? 뭐 사실 구별 못하면 또 어떤가? 감각이든, 기억이든 우리가 느끼는 즐거움엔 별 차이가 없으니.
어디선가 본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글이 생각난다. 모든 감각은 기억이라는 것. 눈이나 코, 피부 등에서 느낀 감각이 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는 데는 아주 잠깐이나마 시간이 걸린다. 결국 우리가 인지하는 감각은 엄밀히 따지면 과거의 사건이고 그래서 기억이라는 주장. (물론 내 생각. 유명 철학자가 이렇게 단순하게 말했을 리는 없다.)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 글을 처음 본 순간 별빛을 떠올렸었다. 밤하늘의 밝은 별 시리우스. 내가 보고 있는 이 별빛은 8년 이상을 달려 내 망막에 도착했고 약 0.1초의 시간 후 내 뇌에, 의식에 도달했구나. 나도 우주의 일부라는 느낌. 이런 걸 초월적 경험이라고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