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생의 평범한(?) 하루
오랜만에 잠을 푹 잤더니 피로가 많이 풀렸다. 한동안 수업 일정이 빡빡했고 다음 주엔 8과목 시험, 한국에도 신경 쓸 일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많이 피곤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오늘 새벽엔 아무도 연락이 없었다.
오전에는 회계 수업. 다음 주 시험이라 리뷰를 해 주는데 다들 너무 어려워한다. 와인 경영 과정이라 회계, 마케팅, 법률 등도 다 공부해야 해서 불만도 많고 예민해져 있다. 오후에 수업이 없어서 같이 스터디를 하자고들 하는데 난 먼저 나왔다. 쏘리.
나오면서 에릭 선생님한테 와이프랑 마자린 도서관에서 공부할 거라 하니 너무 좋아한다. 내게 마자린 도서관과 라디오 프랑스 공연장을 알려준 분. 파리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레스토랑과 호텔업계에서 40년 넘게 근무한 터라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이다. 회계 수업보다 수업 중 가끔씩 "You know what"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정말 재미있었다.
정화랑 오랜만에 한식당에서 점심. 세트메뉴가 16유로니까 정말 저렴하다. 물가 비싼 파리에, 요새 유로가 너무 올라 외식을 거의 못하고 있다. 미슐랭 빕구루망 글도 못 올리고 있고.
마자린 도서관으로. 루브르 맞은편 아카데미 프랑세스 안에 위치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도서관이다. 1643년 마자린 추기경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부가 너무 마음에 든다. 난 이전에 15유로 내고 1년 회원으로 등록했고 정화는 5일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임시 회원권을 끊었다. 두 시간 넘게 열공했다.
파리 야경을 구경하며 좀 걷기도 하고 지하철도 타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 먼저 루브르로. 곳곳에 거리의 음악가들이 있다. 첼로를 켜고 있는 사람,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 멋진 야경의 크고 높은 루브르 건물이 같이 울리는 듯하다. 지하철을 타고 샹젤리제 크레망소 역에 내려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역까지 불빛 가득한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다.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 총리 크레망소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개선문. 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이룬 승리. 과연 우리는 그들의 희생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좌회전해서 몽테뉴 거리로. 샤넬, 디올 등 명품샵이 즐비한데 디올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장 화려하고 눈에 띈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여기 몽테뉴 거리에 모여 있는 건 참 재미있다. 수상록으로 유명한 몽테뉴는 현대 에세이 문학의 창시자라고 한다. 일상적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하는 글을 쓴, 내가 닮아야 할 스승이다. 명품과 몽테뉴, 극과 극인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좀 더 철학적인 사색을 해봐야 할 듯.
센강과 에펠탑의 야경을 잠깐 즐기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집 근처 빵집에 들렀는데 다행히 바게트가 남아있었다. 파리 생활 3개월째 되니까 그동안 맛있던 마트 바게트가 별로. 두께와 발효, 수분의 양, 굽기 정도에 따라 바게트의 맛과 향, 겉바속촉이 다른 걸 알아 버렸다.
저녁을 먹으며 혹시나 내일 라디오 프랑스에서 하는 정명훈 공연에 취소 자리가 있나 하며 찾아보는데. 와, 1층 중앙 네 번째 열, 두 자리가 나와 있다. 어제 안 사길 정말 잘했다. 이층 좌측 별로 안 좋은 자리가 나왔었는데 가격은 똑같이 79유로. 에릭 선생님이 프랑스는 공연 좌석 가격에 제한이 있다고 했었는데 정말 그런 듯. 유튜브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찾아 미리 예습했다.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렇게 좋은 음악당이 있는 것도 파리 생활의 엄청난 장점이다.
내일 연주회에 가려면 조금 더 공부하고 자야 하는데. 음식 과목 공부가 쉽지 않다. 채소, 생선 등 요리 재료의 이름과 언제가 제철인지, 소금의 종류와 친환경 인증 기준. 영어로도 어려운데 프랑스어로까지 알아야 한다. 근데 난 왜 이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