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모먼트
내가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라고 했었다)를 다닐 때는 봄방학이 있었다. 2월 초 겨울방학이 끝나면 2주 정도 수업을 했다. 그리고 봄방학을 하고 3월 초 새 학년이 시작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봄방학 때, 그러니까 3학년 진급을 앞두고 난 전라남도 고흥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도 날 예뻐해 주셨고 같은 반 친구들도 잘 대해주었다. 첫 국어시간, 내가 처음으로 교과서를 읽을 때는 모두 킥킥거리며 웃었다. 내 사투리 때문인지도 모르고 왜 웃지 생각하며 더 크게, 더 또박또박 읽으니 반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어느 정도 잘했지만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다. 올백을 맞은 적도, 반에서 일등을 한 적도 없었다. 6학년 때 반에서 수학(그때는 산수라고 했었다)을 잘하는 학생들을 두세 명씩 뽑아서 한 반을 만들어 방과 후 수업(그땐 뭐라 불렀는지 모르겠다)을 했다. 나중에 그중 10명을 뽑아서 어린이 산수 경시대회에 내 보낸다고. 나도 운 좋게 그 10명 안에 들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 2-3주쯤 후(그리 잘 봤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교실에 있는 나에게 교장실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영문도 모른 채 난생처음 교장실로 들어가니 소년 동아일보 기자가 와 있었다. 내가 산수 경시대회에서 1등을 했단다. 어린이 신문 1면에 실릴 거고 과학기술처(지금은 뭐라 하는지 모르겠다) 장관 상을 받을 거라고.
바로 그 순간 난 수학을 아주 잘하는 학생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 역시 그렇게 믿게 되었다. 그게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의대로 이어졌고. (2012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보며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이런 예기치 못한 행운의 순간을 만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순간을 어떻게 준비하고 활용하는지에 따라 인생의 여정이 바뀌는 것 같고. 와인에서도 이런 생각지 못한 행운의 순간을 부르는 말이 있다. 와인 모먼트(황홀경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 자신의 삶을 바꾼 와인.
와인 모먼트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의 일화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녀는 어느 날 남자친구와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을 마시다가 깜짝 놀란다. 단순한 와인을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느꼈다고 한다. 와인이 후각과 미각만 자극하는 게 아니라 무한한 지적 자극과 호기심을 줄 수 있음을 깨닫고 와인 전문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그 와인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샹볼 뮤지니 레 자뮤레즈 1959년. 샹볼 뮤지니는 마을 이름이고 레 자뮤레즈는 포도밭 이름인데 연인들이라는 뜻이다. 발음도, 의미도 사랑스럽다. 물론 나는 못 마셔본, 아주 비싼 와인이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와인 모먼트를 묻곤 한다. 나의 와인 모먼트 역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이다. 꼬르통 그랑크뤼 2014년.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랑 이름이 비슷하다.) 처음으로 마셔본 피노 누와 일등급 와인이었다. 피노 누와는 우아한 향의 여성스러운 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탄닌의 탄탄하고 강렬함에 너무 놀랐다. 와, 이래서 부드러운 장갑 속 강한 주먹(iron fist in silky gloves)이라고 하는구나.
사실 와인도 훌륭했지만 꼬르통을 마신 순간 역시 와인만큼 훌륭했다. 2019년 1월, 결혼 20주년 기념 유럽여행. (그러고 보니 다음 주가 결혼기념일이다. 잊어버릴 뻔했다.) 아이들 둘 다 대학을 보내고. 신용카드 사용으로 쌓은 마일리지로 구매한 대한항공 일등석.
(내가 생각하는 개인사업자의 가장 큰 장점은 신용카드 사용이다. 사업 경비를 신용카드로 결제해 항공 마일리지를 많이 쌓을 수 있다. 수수료를 좀 내야 하지만 국세도 가능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내게는 안성맞춤. 신용카드 사용으로 쌓은 마일리지로 비즈니스석 보너스 항공권을 끊는 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치. 요샌 너무 어려워졌지만 이전에는 일등석도, 비즈니스석도 여유가 참 많았다.)
잰시스 로빈슨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와인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을 우리와 연결시킨다고. 생각해 보면 내가 느낀 와인 모먼트도 꼬르통보다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와인을 만든 사람, 그 순간을 만들어준 사람, 그리고 그 순간 그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 발효시킨 포도주스에 불과한 와인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