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월간 에세이
퇴근길 기분은 둘 중 하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홀가분하거나, 지나치게 지쳐있거나. 오늘처럼 야근을 한 날이면 어떤 상태일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버스 손잡이를 잡은 팔에 기대 창 밖을 내다본다. 밤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한데 며칠째 비가 내리지 않는다. 뉴스에선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비구름만 가득하고 비는 내리지 않는, 이런 것도 장마일까?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흐린 하늘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다. 비행기라도 지나가 먹구름을 톡 건드리면 금새 눈물이 쏟아질게 분명하다. 덜컹.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은 내가 지쳐있다는 증거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온다. 유월의 소나기는 이토록 갑작스럽다. 예고도 없이 저마다의 걸음으로 다가온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삼단 우산을 꺼내 들고,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거리로 나선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머리 위로 불시착한 빗방울이 반가울 다름이다. 약속된 만남은 주지 못하는, 우연한 마주침 속 설렘 같은 것들이 있다. 무심결에 틀어 둔 라디오에서 잊고 있던 최애곡이 흘러나올 때 느낌이랄까? 혹은 집으로 돌아간 연인이 보고 싶다며 불쑥 찾아왔을 때와 비슷하기도 하다. 운명은 우연의 중첩상태이므로, 우연히도 한가한 시간에, 우연히 내린 소나기를 보고, 우연히 산책할 마음이 드는 것은 내가 맞이해야 할 운명이다.
어둠은 감정을 북돋아 주니, 그러한 운명적 만남은 늦은 저녁이면 더더욱 좋다. 기꺼운 마음으로 비를 데리러 밤마중 산책길을 나선다. 사람들은 물이 튈 새라 고양이처럼 살며시 걷는다. 행인들은 우산의 간격만큼 떨어져 있다. 적당한 거리감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쨍한 가로등 불빛은 날 비춘다기보단 살포시 감싸는 것 같다. 눈을 찌르던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녹는 듯 퍼져나가고, 거리를 활보하는 취객의 고성방가도 비에 젖어 희미해진다. 여름밤 소낙비는 공해를 물감처럼 뒤섞어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렁이는 색채, 낮아진 조도. 빛이 번져나가고 사물의 테두리가 흐릿해진다. 비는 풍경의 윤곽을 풀어헤친다. 흐린 세상은 죄다 닮아있기에 비 내리는 밤거리에선 묘한 기시감이 든다. 익숙한 냄새가 올라온다. 젖은 풀냄새, 오래된 아스팔트에서 나는 물비린내 같은 것들.
그렇고 그런 광경. 그렇고 그런 냄새. 그것이 기억의 경계를 허문다. 빗길을 걷던 어느 날의 잔상이 겹쳐 보인다. 내가 떠올린 건 24년 6월 29일. 비 내리던 대만의 밤거리. 내 서른한 번째 생일이자 우리가 헤어지기 넉 달 전의 기억. 오늘의 우산 아래로 그날의 네가 성큼 들어온다. 차가 지나가면 인도로 물이 튀듯, 넘실대는 과거가 현재를 침범한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흠뻑 젖고 만다.
대만의 여름은 불볕같이 더웠다. 너는 더위에 약했고. 난 여름에 태어났고, 넌 겨울에 태어나서 그랬나 보다. 네 고향 청주는 부산보다 항상 2~3도 낮던데 그런 데서 오는 차이인지도 몰랐다. 여름을 좋아하던 난 해운대의 반짝이는 모래 위에서 윤슬을 바라보며 햇빛을 만끽했다. 겨울을 좋아하던 넌 술만 마시면 눈 밭에 드러누워 백설(白雪)의 품에 안겼다. 그런 너를 남방의 섬, 여름의 심부에 데려다 놓다니. 이러다 네가 녹아버릴지도 몰라. 맞잡은 손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태양 아래서 넌 작은 화목난로처럼 걸었다. 더위에 지쳐 터벅대는 발소리는 장작이 타오르며 나는 달그락 소리 같았다. 말할 수 없는 뭉근한 마음에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괜찮아? 덥진 않아?"
"응 괜찮아!"
단번에 거짓인 줄 알았다. 평소보다 크게 뜬 눈. 뺨을 팽팽히 당겨 만든 미소.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앙다문 입술이 결정적 증거였다. 넌 거짓을 말할 때 항상 보조개를 그리더라. 당장이라도 너와 함께 시린 바닷속으로 뛰어들고픈 마음이었다. 그럼 몸을 덥히는 뜨거운 장작불도 조금은 꺼질 텐데.
"망고 빙수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여기 웨이팅 너무 긴 것 같은데.."
"그래도 망고 먹으러 대만까지 왔잖아. 별로 안 더워. 괜찮아 진짜."
내 생일에 구태여 대만까지 온 것은 전부 망고 때문이었다. 인스타였나, 유튜브였나. 대만 망고는 6월이 제철이라는 영상을 보았다. 난 매번 그렇듯 장난스레 호들갑 떨었다. 자기야, 망고 먹어봤어? 6월에 대만 여행을 간 사람들만 진짜 망고를 먹을 수 있대. 그게 진짜고, 나머진 다 가짜래.
그럼 오빠 생일에 대만 여행 갈까? 너답지 않은 진지한 대답이었다. 내가 과장해서 말하면 넌 타박하며 웃을 차례인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아냐 아냐, 여름에 대만 가면 엄청 더워. 손사래 치며 거절했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가자 대만! 가자 가자! 음.. 많이 덥다는 데 괜찮을까? 계속된 내 걱정에, 넌 보조개 지으며 답했다. 망고는 여름 과일이잖아. 그 정돈 더워야 진짜 망고지. 움푹 패인 볼우물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렁거려 네 말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이었다.
하필 내가 찾은 망고빙수 가게는 오래된 건물 사이에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거리와 긴 줄. 빙수를 포장해 가는 사람들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 빙수 가게가 쓰러질듯한 노포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기자기한 디저트 카페겠거니 혹은 나빠봤자 설빙 정도겠지 생각했던 나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더위에 걷기가 힘들어 구글 평점만 훑어본 채 섣불리 찾아온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로컬 빙수가게로 가야 진짜 망고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번화가에서 너무도 벗어나버린 탓일까? 노포답게 책상 모서리는 닳아있었고, 가게 안은 런닝 입은 아저씨들과 꽃무늬 반팔을 입은 아주머니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길가에는 더위에 지친 개들이 혀를 내 뺀 채 쓰러져 누워있었다. 갈빗대 앙상한 가여운 개들.
가게 입구에 놓여있는 망고가 노란색인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게 상상과 달랐다. 가장 기이했던 건 가게 구조였다. 양 쪽 벽이 뻥 뚫린 채 거리와 이어진 내부는 마치 조그만 입국심사대 같았다. 여름 망고 드셔 보셨나요? 삑- 통과. 삑- 입국 거부입니다. 몸집이 큰 아저씨가 지키고 있다는 점까지 똑같았다. 기왕 같은 컨셉이면 에어컨도 공항처럼 빵빵하게 틀어주지. 달궈진 아스팔트가 내뿜는 더위만이 가게를 가득 채웠다.
기나긴 웨이팅 끝에 테이블을 잡고선, 머리를 달달 떠는 자그마한 선풍기에 의존해 망고빙수를 허겁지겁 들이켰다. 빙수는 입에 넣자마자 솜사탕처럼 사라졌다. 테이블 위의 빙수도 더위에 순식간에 녹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넌 망고를 이리저리 피해 하얀 얼음 조각만 씹었다.
"다 녹겠다. 망고부터 얼른 먹어봐. 완전 달아."
"응응."
넌 한두 개 먹더니, 이내 나더러 네 몫까지 다 먹으라 했다. 그러고선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어놓았다. 사실 너에겐 망고 알러지가 있다며. 그다음엔 네가 뭐라고 했더라? 한두 개 정도는 먹어도 된다고 그랬던가, 맛볼 요량으로 조금 먹었는데 너무 맛있더라 그랬었나. 숨이 멎을 듯 놀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동안 멈춰있었다. 그러다 횡설수설하고 침묵하길 반복했다. 넌 그러는 나에게 쉽게 말했다.
"나 옻 알러지 있거든. 망고나무도 옻나무래. 옻 알러지 일으키는 무슨 성분이 망고에도 있다나?"
그 화학물질에 민감한 사람은 망고도 못 먹는다고, 너는 설명했다. 해맑게 전하는 네 말을 듣고 있자니 깊은 곳에서 열감이 올라왔다. 속이 타들어가고 입안이 바싹 말라 까끌해졌다. 얼굴도 금방 벌게졌다. 삼킨 망고가 검은 옻나무가 되어 내 안에 숯처럼 쌓여있는 것 같았다.
"빙수는 맛있어?"
"응, 무슨 연유 같은 걸로 만들어서 맛있네."
곧장 카운터로 찾아가 무꽈(木瓜) 빙수를 시켰다. 이건 파파야인데 먹을 수 있지? 넌 괜찮다고, 미안하다는 듯 왜 그러냐고 타박했지만, 종업원이 가져다준 파파야 빙수가 내 얼굴을 전부 가릴 정도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뭐 이렇게 많이 시켰어?"
"나도 몰랐지.."
겸연쩍은 내 모습이 그리 재밌었을까? 넌 더위는 잊고 맘껏 웃었다. 웃고 있는 입술은 망고 알러지 때문인지 팽팽히 부풀어있었다. 동그랗게 부어오른 네 입술이 빨간 비눗방울 같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넌 터질 듯한 입술로 파파야 빙수를 먹었다. 오빠는 왜 안 먹어? 하는 네 질문에, 난 입술을 내민 채, 나한텐 파파야 알러지가 있나 봐 너스레 떨었다. 너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안 그래도 얼굴을 마음껏 구긴 시원한 미소가 그립던 찰나였다. 널 보고있으니 가벼운 청량감이 들었다. 여름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오후 일정까지 전부 마치자 비가 쏟아졌다. 비가 와도 더위는 여전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땀으로 흠뻑 젖었다. 길을 거니는 사람들도 빠짐없이 그랬다. 대만이 이렇게 습한 건 어쩌면 사람들이 흘린 땀 때문일까, 생각하고 나니 땀방울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짭짤한 공기가 찝찝하게 느껴졌다. 얼른 숙소로 들어가려는데, 너는 친구 선물을 사야 한다고 했다. 어떤 남자애가 위스키를 사 와 달라고 그랬더랬다.
가까운 리큐르 샵에 들어가 위스키 사진을 내밀었다. 주인아저씨가 술을 한 병 가져왔는데, 우리가 보여준 사진과 미묘하게 달랐다. 휴대폰 속 사진을 다시 보여주니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도 사진 속 위스키와 가장 비슷한 것으로 가져와주신 듯했다. 위스키는 왜 이렇게 종류가 많은 거야 정말. 소주와 맥주에 익숙한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너와 합심해 툴툴대며 다른 가게로 옮겨갔다. 그렇게 가로 젔는 고갯짓을 마주하길 몇 차례. 괜히 심술이 났다.
"치, 여기도 안 파네.."
"이제 들어갈까? 벌써 밤인데, 비도 오고.."
"오빠, 몇 군데만 더 둘러보자."
"이미 한참 걸었잖아."
"돌아다닌 게 아까우니까 그러지.."
"아니 뭐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도 빠듯하다며. 아끼느라 네 껀 하나도 안 사면서, 그걸 왜 사다 줘."
"돈은 한국 가면 걔가 준다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게 그렇게 중요해? 널 먼저 챙기면 안 돼? 그거 들고 가려면 짐은 또 얼마나 더 무거워지는데. 그리고 저 가게에 간다고 해도 원하는 위스키를 판다는 보장도 없잖아. 이미 서너 군데 들렸으면, 그 정도면 할 만큼 했지. 또.."
"그래도 그러고 싶어. 한 번만 봐주라, 한 번만"
휴우. 그러고선 리큐르 샵을 서너 군데는 더 돌았다. 겨우 찾은 가게에선 현찰만 받는다는 말에 ATM을 찾아서 수십 분은 더 헤맸고. 설상가상 잘 터지던 데이터가 먹통이 되고, 카드를 삼킨 편의점 ATM이 돈을 뱉지 않아 한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ATM 앞에서 너는 미안하다 그랬다. 나는 괜찮다고 그랬고. 실은 괜찮지 않았다. 그런 순간에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면 넌 상심한 죄인이 되고 난 억울한 재판관이 된다. 그게 싫었다. 너와 나 이외의 그 무언가가 되는 게. 미안해야 하고 괜찮아야 하는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게. 너도 내 거짓말을 금방 눈치챘을까? 그 뒤론 빗소리만 들렸다. 터벅대는 지친 발소리만 들렸다. 나도, 너도 고장 난 ATM처럼 말을 삼켰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엔 인파가 가득했다. 비는 여전히 보슬거렸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차분했다. 비가 오는데도 그랬다. 난 겨우 인출한 현금을 가지고 네가 그리 찾아 헤매던 위스키를 샀다. 돈을 건네고 위스키를 넘겨받는 그 짧은 사이에 넌 어디론가 사라졌다. 가게를 나서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던 순간, 검은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숨을 고르던 넌 별다른 말없이 그걸 내게 건넸다. 넘겨받은 봉지가 꽤나 무거워서 놀랐다. 의아한 마음에 열어보니 산들빛 샛노랑 파파야가 있었다. 잔뜩 들어 있었다. 그 속에선 상큼한 풋내가 났다.
.. 나 파파야 알러지 있는데. 평생 그 말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자연스레 말했다. 넌 살짝 째려보며 싱긋 미소지어 보였다. 그런 널 보며 나도 멋쩍게 웃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발 밑 물웅덩이엔 네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게 호수 속 검은 잉어 같았다. 야시장 가판을 두드리는 자욱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숙소로 돌아가던 길. 양손에 위스키와 파파야를 들고 네가 씌워준 우산 밑에서 걸었다. 서로 꼭 붙어 걸었다. 같은 길을 걸으며 우린 무용한 이야기를 나눴다. 몰래 위스키를 몽땅 마셔버리겠다느니, 다음 여행은 눈 보러 가자느니 하는 가벼운 이야기들. 작은 대화들이 방울지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우리가 빗길을 걸을 때, 밤거리는 검은 캔버스가 됐다. 나누는 말은 흐린 연필이 되고, 감싸는 우산은 커다란 붓이 됐다. 밤빛 품은 웅덩이는 조그만 팔레트가 되고, 첨벙이는 걸음은 수채를 했다. 함께 시간을 그리다 보면 내뱉는 숨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엔 망고처럼 입술이 부풀어버리고 만다. 파파야처럼 속절없이 웃어버리고 만다.
저 너머 보이는 호텔 불빛은 빗 속에서 일렁대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숙소 찾기가 어렵다며, 괜히 빙빙 둘러 실컷 걸었다. 자정이 넘었지만 함께하는 밤은 아직 설익었고, 그려야 할 도화지가 한참은 남았다. 비 내리는 거리, 수채화 같이 푸른 유월의 밤엔 파파야 향기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