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퀴클롭스

2-1 월간 에세이

by 흔한

0.


도요타는 생산방식의 전위적 변화로 혁신을 이끌었다. 도요타생산방식(TPS)의 골자는 이렇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필요한 때에 생산한다. TPS를 고안한 오노 다이이치는 첨언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필요한 물건을 적시 공급하는 일이라고.




1.


적시 공급의 원칙은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 느껴질 때면 출근길에 카메라를 챙겨간다.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에 오르는 일련의 출근 공정 속에 필름카메라가 알맞게 끼어든다. 컨베이어 벨트 위 하루에 적재, 적소, 적시 공급된 600g 후지 필름 카메라는 TPS가 그랬듯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필름 카메라는 (당연하게도) 촬영 횟수에 제한이 있다. 셔터를 누를 기회는 36번. 한 달은 30일이니 난 하루 한 컷의 사진 찍을 기회를 얻는다. 보너스 6컷은 주말의 몫이다.


인간의 삶이 찬란한 이유는 죽음 때문에 그렇다고 하던데. 그전까진 이 말이 와닿지 않았으나 이젠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필름 카메라 같은 거구나? 내 셔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 움직일 수 있으니, 마주하는 순간마다 기꺼이 필름의 한 칸을 내어줄 만한 순간인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사물이 피사체로 보인다. 이러한 필름카메라의 특성 때문에 필름카메라를 손에 쥘 때면 하루에 온전히 집중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유한한 촬영 횟수가 삶을 무한히 늘리는 경험을 통해서야 어리석은 난 유한성의 미학을 깨닫는다.


찰칵. 필름카메라는 다소 유난스럽다. 그래서 눈을 깜빡일 때에도 소리를 낸다. 반짝. 밤에는 안광을 빛낸다. 카메라는 하루를 소란스레 기억하고, 난 카메라를 품고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곤 하루를 슬로우셔터로 복기한다. 내가 마주한 하루에 베스트 한 컷을 찍어냈을까? 버스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이의 빨간 스웨터가 뽀얀 볼과 대비를 이뤄 이뻤는데. 아이의 뒷모습은 별생각 없이 찍어도 예술적 고뇌가 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걸 포기하고 선택한 피사체가 소품샵인 건 너무 세속적인가?


곰곰이 되짚어보지만, 후회는 없다. 아니 후회할 수 없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할 테다. 필름 카메라는,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도) 촬영 결과를 미리 알 수 없으니까. 심지어 편집도 보정도 없다. 관찰. 촬영. 인화. 정직한 세 단계로 마무리된다.


어쩔 땐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마주한다. 내가 담고 싶었던 초록 간판에 의도치 않은 빛 번짐으로 노란색이 묻었다. 하루를 거짓되게 남겼나 싶다가도, 이게 현실에 더 가깝다 생각되기도 한다. 세상은 언제나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던가. 그러니까 필름카메라는, 세상을 상대로 한 제비 뽑기 같은 거다. 분명 내 뜻대로 선택했으나 결과는 알 수 없는.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나 잔인할 정도로 공정하기에 끄덕이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그런 거.


매번 어긋나는 세계이지만 오늘도 필름을 감는다. 시간의 강 위에 살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은 고루한 뱃사공의 뒷모습처럼 늘 아득하게 멀어진다. 행복한 시간도 금방 과거가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를 너무도 쉽게 지나쳐 지난 삶이 의미 있었는지 의심이 드는 순간엔, 그리하여 발을 딛고 있는 현재마저 불안해질 때에는, 고이 모아둔 사진을 꺼낸다. 사진을 찍는 일은 금방 사라지는 오늘에 찰칵, 갈피를 끼워두는 작업이다. 책갈피를 펼치면 언제나 그리워했던 눈부신 순간이 펼쳐진다.


찰나를 고르고 골라서 과감히 필름에 가둔 하루 한 컷. 그렇게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모은 사진들이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렌즈를 거쳐 멀리서 바라본 내 삶은 아름다운 것 투성이었다. 이 쉬운 걸 찾아 헤맸다는 게, 잃어버린 휴대폰이 손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민망하고, 그리고 반가웠다. 내가 찾던 아름다움, 여기 있었구나. 이렇게나 가까이.




2.


그리스 신화에서 외눈박이는 괴물로 묘사되지만, 사실 태초의 외눈박이는 신적인 존재였다. 최초의 외눈박이인 퀴클롭스들은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난 삼 형제로, 각각 브론테스(천둥), 스테로페스(번개), 아르게스(벼락)이다. 이들은 대장장이이자 기술자들로 온화한 성품과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능력과 힘을 두려워한 우라노스에 의해 감금당했다고 전해진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역사로 격하되었다. 자신의 자리를 잃은 신들은 작은 물건 속에 몰래 깃들었다. 제우스는 포악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져건 속에 숨었다. 라이터는 주머니 속 작은 프로메테우스다. 그렇다면 퀴클롭스는 어디에? 풀무질 대신 자동화공정과 도요타생산방식이 자리 잡은 요즘 세상에 대장장이가 갈 곳이 마땅치 않을 텐데.


다행히도 퀴클롭스 역시 실존했다. 필름 카메라라는 이름으로. 아 물론, 천둥 번개 벼락의 “번쩍 우르르 쾅쾅”이 손 위의 “반짝, 찰칵”이 되었지만. 신화란 원래 과장과 허풍 투성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외눈박이인 건 똑같네 뭐. 퀴클롭스도 눈이 한 개. 카메라도 눈이 한 개. 사진을 찍을 땐, 나도 눈이 한 개.


필름 카메라 앵글에 세상을 담는 건, 대장장이 신의 힘을 빌려 인간에서 신적인 존재로 승격하는 숭고한 경험이다. 필름은 내가 셔터를 눌러 카메라의 눈을 깜빡일 때만 세상을 담는다. 셔터가 눌러지지 않으면, 필름 속 세상은 죽은 세상이다. 무언가를 촬영하는 일은, 필름에 형태를 새기고 색채를 입혀 생을 부여하는 신성한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삶에도.



3.


슬픈 건, 내 행복의 한도는 월 2만 원인데, 필름 가격이 끝도 없이 인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언제나 외눈박이에게 이토록 모질다. 이번에도 우라노스의 농간인가? 아 잔인한 역사의 반복이여.


서러운 마음에, 몇 번은 필름이 없는 빈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제한이 없으니 귀엽다 싶은 모든 것에 셔터를 누른다. 그러다 이내, 에잇 재미없어. 결국에는 식비라도 줄여 필름을 사고선, 한쪽 눈을 질끈 감아 외눈박이 신화의 세계로 되돌아가고야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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