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1-4 월간 에세이

by 흔한

“목적이 없는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해 볼까 해.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말을 걸던 나잖아. “수신 없는 편지와 결론 없는 대화는?” 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마음먹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야. 넌 항상 주변의 거창한 목표들을 떨쳐내고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려 노력했잖아.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어? 아님 예전의 나처럼 무언가를 찾아다니니? 아무렴 어때. 큰 생각들도 가볍게 손질해 쉬운 일로 만들던 너인걸. 그래서 이 편지는 네 방식대로 써 보려고. 생각은 줄이고 손이 가는 대로.


얼마 전, 창고 정리를 하다가 네가 남긴 편지를 봤어. 7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아직 내게 머물러 있는 줄 몰랐어. 찬찬히 편지를 읽다보니 보이는 건 검은 글자들 일테지만, 정작 마음 써 들춰보고 싶은 건 흰 자간 속 네 마음이야. 차분히 눌러 쓴 네 편지 속에는 중요한 단어가 유난히 넓은 간격으로 적혀 있더라. '좋 아 해.' '보 고 싶 어.' 그런 말들을 쓰기 민망해 망설이던 흔적이었을까? 아니면 편지지 너머의 나에게 또박또박 분명히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니? 네 편지를 다시 읽고 나서야 비로소 '보고 싶어'와 '보 고 싶 어'가 전혀 다른 말인 줄 알게 되었어. 욕조에 손을 집어넣고 물이란 단어를 배우는 헬렌이 된 기분이야.


그렇게 한참 글씨가 아니라 공백만 읽다가 이렇게 펜을 들어. 특별한 목적이나 의도는 없어. 그리움도 미련도 아니야. 그냥, 특정 시기에만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있잖아. 그게 지금인 것 같아서 한 번 써 보려 해. 사랑이 다 식은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


난 최근 글쓰기 모임에 나가고 있어. 거기서 멋진 글과 기억에 남는 글은 전혀 다르다는 걸 배웠어. 항상 후자를 택하고자 노력하는데, 정작 본심은 더 화려한 글을 쓰려 안절부절 못하더라구. 이제야 난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다시금 깨닫고 있어. 멋 부리지만 멋있지 않은 사람.


모임에서 글을 읽다 보니 기억에 남는 글은 솔직한 글이더라. 그런데 난 언제나 뒤늦게 솔직해지는 편이잖아.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을 때면 솔직해지자 백번은 다짐하는 나지만, 나에겐 너무 요원하고 지지부진한 일이야. 이 편지만 해도 그래. 진심을 담아서 써야 해. 하지만 내 앞에 놓인 백지는 태평양처럼 터무니없이 막막해. 이 너른 종이가 가득 찰 만큼, 네 우주와 생에 존재를 드러낼 만큼 진심을 담아야 한다는 게 내겐 너무도 어려워. 아니, 사실은 두려워. 내 진심은 씨앗만 해서, 아무리 아끼고 잘 구슬린다 한들 겨우 한 포기 꽃이나 피울 수 있을까 걱정돼.


해변에 핀 갯메꽃을 본 적 있어? 바람을 피하려 키를 한껏 낮추고, 떠내려갈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모습이 처량해. 그중 홀로 떨어진, 조금 모자란 갯메꽃이 나인 것 같아. 내 진심은 아무리 꽃 피워도 넓고 푸른 바다에 맞서기엔 너무 미욱해. 바다는 커녕 육지도 다 메우지 못해.


흰 여백이 주는 압박감에 짓눌려 억지 열정을 담아 문장을 써 내려가고 나면, 드러난 내 열정은 뜨겁지 않아 열정이라 부르기 민망해. 침묵을 피하기 위해 가까스로 짜낸 말 같아. 쓸모없고 서툰 들꽃이야. 아직도 난 쉽게 고개 숙이는 갯메꽃처럼, 몸을 낮춘 채 바닷바람을 피하며 타협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어. 바람도 버거운데 파도는 언제쯤 이겨낼 수 있을지. 파랑에 밀려나는 내 삶은 그 자체로 뒷걸음질이야. 누군가는 대서양를 건넌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갈 때, 난 길 잃은 부표처럼 제자리에서 헛자맥질을 계속해. 어때, 걱정 많은 모습이 예전이랑 똑같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할 때, 그런 말을 들었어. 좋은 글은 구구절절 말하는 게 아니라 보여주는 거래. “진심을 쓰세요. 그냥 보여주듯 쓰면 됩니다.” 글감은 진심, 방식은 보여주기. 그것이 글의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성배라도 되는 냥 마시기를 권하더라구. 으악. 난 곧장 질려버렸어. 보여주기는 내가 제일 못하는 일이거든. 도전을 피하는 비겁함. 비겁하다는 비난조차 피하려 견딜만한 시도만 반복하던 비열함. 그 속에 살다 보면 진심을 보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어.


숨길 수 없는 애정을 품고 사는 문우들이 부러워. 그들의 글 솜씨가 부러운 건 아냐. 나보다 훨씬 뛰어나긴 하지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간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정말로 도달할 수 없다고 느끼는 건 삶을 견지하는 태도야. 급류에 몸을 던지는 용기, 화마에 그을리며 나아가는 걸음, 패배의 모서리를 끌어안고 비애의 늪에 사는 어설픈 미성숙까지 사랑하는 그런 태도 말야. 누군가는 마라톤과 수영, 츄러스와 후라이팬 같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모아서 행복을 꾸려나가던데, 난 아직까지도 거창한 추락을, 분분한 낙화를 좋아해.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법 모르는 나에게는 일상을 사랑하는 이들이 내쉬는 들숨과 날숨까지 용기로 보여. 공기를 가득 담아 부풀어 오른 폐. 데워진 공기를 과감히 내뱉는 숨. 난 그런 걸 할 줄 몰랐어. 무언갈 사랑할 땐 비우면 담고, 담으면 비우는 그런 게 필요한데 말이야.


돌이켜보면 너를 좋아했던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것 같아. 난 날숨을 잊은 채 들숨만 쉬는 사람이었어. 삶의 모든 면에서 비울 줄 몰랐어. 빈 책장이 보이면 서점에 가서 책을 한가득 사 와야 했고, 책장이 가득 차면 새로운 책장을 또 사서 채우길 반복했어. 남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건 더 버거웠어. 숨을 들이마시기만 반복해서, 갈비뼈 사이를 공기로 가득 채운 채 누군가 들어올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어. 숨을 내뱉어 남에게 마음을 베풀 때면 내 숨을 불쾌해하진 않을지 걱정됐거든. 넌 나와는 반대였어. 들숨은 잊고 날숨만 헐떡였어. 친구를 만나고, 무언갈 선물하는 게 네 유일한 낙이었잖아. 넌 친구의 취향과 고민을 모두 꿰고 있었고, 그들에게 네 숨을 끝없이 나눠줬어. 난 그런 네 다정함이 좋았어. 가득 찬 숨을 뱉을 줄 몰라서 가슴만 잔뜩 부풀린 남자애가 숨을 뱉기만 하느라 캑캑대는 여자애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었겠니?


넌 그런 사람이었어. 어둠을 빛의 부재가 아니라 안락함이라 해석하는 사람. 긍정과 다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밤 10시, 통금시간만 되면 걸려오는 전화와 부모님의 채근에 날 달래며 네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통금은 외동인 너에 대한 부모님의 엇나간 애정이자, 부모님 사이 불편한 관계의 징검다리라고 설명했지. 그래도 딸내미가 집에 있으면 두 분이 덜 싸운다고 말이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어딘가 까끌한 관계. 직장에 나가지 않는 아버지와 다소 성미가 급한 어머니 양쪽 모두의 잘못이라 설명했지만 너에겐 더 깊은 어둠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았어. 넌 다정함을 말할 때, 부모님에 대해 말하는 대신 미국 유학시절 홀로 방문한 캔디샵을 입에 올렸으니까. 중학생이 머나먼 이국 땅, 사탕가게에서 느낀 위안은 어떤 맛이었을까? 고향보다 타국을 다정하게 느낀 어린 마음은 얼마나 고독했을지. 그러면서도 네 말의 마무리는 줄곧 부모님에 대한 이해로 끝나. 부모님이 드리운 어둠은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네 해석을 머리론 이해를 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긴 어려웠어.


어느 날에는 다툼의 기원을 찾으려 갈등의 가계도를 그리기도 했었어. 손이 부르터지도록 고생한 네 할머니. 넌 종종 할머니가 하나뿐인 손녀를 보려고 앙상한 몸을 힘겹게 돌리던 장면을 말하곤 했어. 임종 전의 할머니는 남편도, 아들도 다 제쳐두고 손녀인 너를 보며 말했다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라며, 내 몫까지 부지런히 놀다 가라며. 그날 이후 몇 주는 부모님이 덜 다퉜다고 그랬잖아. 또 그 뒤로 한참은 오히려 더 다투셨더랬지. 할머니의 부재가 갈등의 심화 요인인 것 같다고. 그리고 할머니 몫까지 네가 중재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네가 그 이야기를 할 때면 거룩한 영혼의 편린을 엿봤어. 내 불행을, 일 인분의 절망을 삼키기도 벅찬 나에게 가족의 몫까지 몽땅 끌어안은 넌 완전한 존재였어.


때때로 네 다정함은 강박처럼 보이기도 했어. 우정보다 이득을 앞세우던 이도 친구라 불렀으니 말이야.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락한다며, 걘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던 너에게 난 하루빨리 걔를 손절하라 했었지. 술을 마시고, 택시에서 걔가 널 하인 대하듯 발로 툭툭 치는 장면에 속상했던 내가 틈만 나면 말했어. 하지만 넌 그러지 못했어. 너도 걜 이해할 순 없지만, 분명 우리가 모르는 어려움을 품고 있는 것일 거라고. 네 이해는 폭력도 품을 수 있는 걸까? 너에게 마음이란 맺고 끊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일까? 등 돌린 과녁을 향해 애정을 끝없이 쏘아 보내는 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정함이란, 언젠가 다시 마주할 순간을 기다리며 쉴 새 없이 활을 쏘는 마음이라는 걸 너를 통해 배웠어. 상대방의 닫힌 마음을 관통할 화살을 겨누는 것. 화살을 쏘아보내 상대방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 바닥에 처박힐지라도, 결국엔 닿을 것이라 희망하면서.


미워하는 이에게도 진심을 내어주는 너와, 믿을만한 이에게도 진심을 보이기 어려워하던 나. 난 그런 너에게 자주 말하곤 했어. 진심을 보이는 일이, 마음을 주는 것이 나에겐 너무 어렵다고. 그렇게 투덜대면 넌 이렇게 말했어. 모든 순간에 전부 다 진심을 쏟는 건 아니라고. 사람들은 살아가며 수많은 가면을 쓰니, 필요한 순간에 마음에 드는 적절한 가면을 찾으면 그게 진심인 거라고.


사실, 난 그 말이 싫었어. 진심을 보이기도 어려웠지만, 가면을 보여주는 건 더더욱 어려웠거든. 생각해 보니 내가 진정 어려워했던 건 ‘진심’ 쪽이 아니라 ‘보이는 일’이었던 것 같아. 초라한 진심이라도 보이지 않고 품고 사는 건 견딜만했거든. 보인다는 건, 가난한 마음을 드러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


그래도 굳이 보여줘야 한다면, 민낯을 보이는 편이 쉬웠어. 스스로에 대한 불만은 열등한 유전형질에 죄를 물을 수 있으니까. 이따금 추한 진심은 솔직함으로 둔갑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에 반해, 내가 고르고 고른 가면이 실은 조악한 취향과 덜떨어진 기호의 결과물임을 깨닫는 순간엔 영혼이 벌거벗는 기분이었거든. 최선을 다해 꾸민 가면이 흉한 모습일까 무서웠어. 이런 건 누구의 핑계도 댈 수 없잖아?


목적 없는 편지가 여기쯤 미치니, 널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진심도, 가면도 보여주길 싫어했던 나에게 넌 하나의 해답이었어. 넌 항상 웃고 다녔고, 자신 있게 존재감을 뽐내며 다녔잖아. 모든 게 나와는 정 반대였으니, 나에 대한 확고한 불신은 너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같은 말이었어. 딱 내가 초라한 만큼 넌 멋있었고, 그래서 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존재였어. 너와 난 근원이 다르다고 느꼈어. 넌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먹고 자란 신의 아이 같았고, 난 그 흔적을 추앙하는 신도라 생각했어. 난 너의 방식으로 사유할 수 없었어. 항상 행복하고 모든 관심이 타인을 향해있는 다정한 너처럼 말이야. 내 영혼은 육신에 유폐되어, 아직도 모든 질문의 과녁은 나를 향해 있어.


너와 친해지고 난 이후부터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말이 좋아졌어. 널 만날 때면 빈 가면에 네 눈동자를 그렸어. 다음번엔 눈썹, 그다음엔 입술. 널 만날 때마다 난 딱 하루치만큼 널 닮아갔어.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고. 말라비틀어진 내 거죽이 아니라, 널 닮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게. 가면을 쓴다는 말이 ‘(널 닮은) 가면을 쓴다’로 바뀐 뒤, 무수한 가능성을 전부 다 가진 것 같았어. 빛나는 널 싫어할 사람은 없으니, 널 닮은 내 가면도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것이었지.


나를 견디기도 버거워서 세상을 상대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어.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는 게, 내가 나로써 존재하는 게 나에겐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래도 널 바라보는 일은 꽤 할만했어. 그래서 네 다정함을 추앙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했어. 널 흉내 내서 정 많은 사람인 척 굴었고, 사람들의 어두운 사연을 들으려 노력했어. 그때 내 진심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기보다, 널 따라하며 너를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어. 난 줄곧 네 영혼의 외투만 더듬었어. 네가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것처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여기는 너와 자주 오던 광화문 카페야. 그 때나 지금이나 밖엔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싸구려 멘트가 떠다녀. 난 확고한 불신론자지만 그래도 이젠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 세상은 그것으로 가득 차. 하루하루 그 사람을 본떠서 얼굴 가죽을 덮어. 모두에게 다정하던 네 형상을 본뜬 나는, 세상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있어.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믿는 방식이고, 누구라도 믿으면, 세상을 온통 사랑할 수 있게 될 정도로 믿으면, 천국에 도달한다는 의미이겠지. 중요한 건 예수가 아니야.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널 믿어도 천국에 가. 세상 누구라도 간절히 사랑하고 믿으면 천국에 가나 봐. 널 향한 사랑과 믿음, 너와 닮고자 하는 내 소망은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야.


세월은 참 많은 것을 바꿔놓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 말에 찬동하던 내가 믿음, 소망,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 말을 들으면 더 놀랄껄? 나 요즘 결혼을 생각하고 있어. 만나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니고, 정말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어.


결혼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젠가 결혼한다면 그 상대가 너였음 좋겠다'는 네 은근한 청혼이 떠올라. 왜 결혼하고 싶냐는 내 질문에 결혼은 영원의 약속, 안정적인 사랑이라고 답했잖아.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약속은 믿을만한 게 못된다고 생각하던 나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내 모든 불행까지 나눠가져야 할 텐데, 어떻게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겠어.


난 그런 게 두려웠어. 네가 그랬잖아. 조그만 방 하나만 구해도, 아님 내가 살고 있는 집 사랑방만 내주면 평생 살 수 있다고. 넌 작은 사랑방이라도 좋다고 말했지만, 내 마음의 치수를 재면 너랑 둘이서 몸 누일 공간조차 나오지 않을까 봐. 내가 네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듯, 네 얼굴도 내 얼굴에 물들까 봐. 너의 다정함에 내 무기력이 번져 찬란한 빛을 잃을까 두려웠어.


너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면, 바다를 청무우밭이라 착각한 나비 이야기*가 생각났어. 내가 삶에 퍼렇게 질려버린 볼품없는 갯메꽃이라면 넌 순수한 하얀 나비 같았거든. 만약 나랑 결혼하게 된다면, 우린 함께 파도를 건너며 소금에 절여질 텐데. 고난이 끝나고 네가 해안에 도착할 땐 꽃다발이라도 잔뜩 안겨줘야 할 테지만, 내가 가진 건 시들어가는 보랏빛 갯메꽃이 전부야. 내 전부를 줘도 항해의 대가론 부족해 보여. 때로는 이런 의심도 들었어.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우리 앞에 놓인 바다를 청무우밭이라 착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청무우밭이 아니라 깊은 수심을 감춘 바다가 앞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네가 알게 된다면? 설령 청운을 헤쳐나갈 각오를 했더라도, 소금기 가득한 바다 위를 비행한 대가가 고작 나라면 처음부터 바다를 건너지 않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이제는 이해해. 바다를 건널 각오를 한 사람만이 결혼을 말할 수 있다는 걸. 결혼은 사랑을 영원히 보존하고자 하는 소망. 그것이 불가능할 것을 알지만 끝없이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 그 과정에서 마주할 숱한 좌절들까지 함께 견디며 살아가자는 낭만적 고백인걸. 네가 보여준 용기 덕분에 누군가 내게 청혼한다면, 혹은 내가 구혼해야 한다면 이별을 택하는 대신 이렇게 진심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앞에 놓여있는 건 사랑방과 청무우밭이 아니라 단칸방과 검은 바다라고. 그러니 영원한 사랑을 약속할 자신은 없지만, 꼭 약속 같은 걸 해야 한다면 둘이서 손 잡고 같이 불행해지자고.


이젠 내게도 멋진 가면이 몇 개 더 늘었어. 덕분에 이젠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어. 너가 말한 대로 쓸만한 가면 중 가장 적당한 걸 걸쳐. 네가 알려준 다정함, 누군가에게 배운 위로와 공감, 우연히 얻게 된 포옹하는 방법까지. 지금 이 편지를 쓰는 내 얼굴엔 어떤 가면이 씌워져 있을까? 글에 진심이 조금은 실린 걸 보니, 어쩌면 당당한 네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을까?


널 다시 만나면 네가 건네준 가면도, 타인에게서 받은 다른 가면도 다 자랑하고 싶은데. 의류수거함에 옷을 넣듯 무심하게 툭 이 편지를 우편함 속으로 던져 넣고 싶은데. 막상 글이 끝나갈 때가 되니 그럴 용기가 안나. 편지를 보냈다간 지나간 사랑이라는 것만 괜히 확인하게 될 것 같기도 해.


그래서 이런 마무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길 잃은 글이 스스로 명을 다하게 내버려 두는 거. 왜, 인터넷을 정보의 바다라 하잖아. 언젠가 너가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하면서, 이 편지를 이렇게 바다에 띄워. 파도에 찬찬히 밀려가는 추억을 바라보면서, 기억이 떠내려갈 정도로 무심하진 않게.




(* 김기림 - 바다와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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