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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탕, 그런데 이제 메기를 곁들인

1-1 월간 에세이

by 흔한

0.


흑백요리사 세미파이널 주제는 <이름을 건 요리>였다. 에드워드 리 셰프는 참치비빔밥을 메인 디쉬로 내놨다. “에드워드는 위스키 마시지만, 이균은 막걸리 마셔요.” 자신은 미국과 한국이 섞인 비빔인간이니, 이 음식이 곧 자신의 이름이자 정체성이라고 했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담은 한 그릇에 안성재 셰프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 김치 섞인 밥을 둥글게 말아 튀기는 요리법이 문제였다. 안성재 셰프는 이미 섞여있는 밥을 나이프로 잘라먹는 음식이 어떻게 비빔밥이냐 되물었고, 비교적 낮은 점수를 부여했다. 그는 추후 인터뷰를 통해 비빔밥이 아니라 덮밥이라고 했으면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안성재 셰프의 평가는 소박한 논란을 낳았다. 사람들은 비빔밥에 대한 각자의 해석을 내놓았다. 비빔논쟁의 가장 유명한 해석은 비빔대왕의 것이었다. 비빔대왕은 모 방송국 인터뷰에서 비빔법률에 따라 비빔밥이 맞다고 판결했다. 근거를 비빔법률이라 말하는 천재적인 지성에 대항할 용감한 자는 드문 법이니 사람들은 다들 수긍했다. 딱 한 명, 나만 빼고.


스테이크처럼 썰어 먹어도 비빔밥이라... 하긴 만물비빔설의 주창자이니 오죽할까 싶긴 한데 내 비빔 세계에선 그런 사문난적은 인정 못하겠다. (이렇게 말하니 비빔대왕과 비슷한 부류로 느껴지지만, 안심하셔도 좋다. 난 조금 다른 종류의 광인이다.)


비빔의 본질은 ‘비벼져 있는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비비는 행위’에 있을진대. 비벼져 있는 밥을 썰어 먹으면 ‘비빔’ 밥이 아니라 ‘비빈’ 밥이잖아. 차라리 맨밥에 카레를 붇고선, 밥에 소스를 비벼 먹는 음식이니 이것도 비빔밥이다 주장하면 고개가 끄덕 넘어갔겠지만, 비비지 못하는 비빔밥 같은 건 에드워드 리가 아니라 요리왕 비룡이 와도 용납하기 어렵다.



1.


에드워드 리 셰프에게 참치비빈밥이 있다면 내겐 메기매운탕이 있다.


메기매운탕은 먹기 꽤 힘들다. 지나치게 비싸다거나 역겨운 맛이라 그런 건 아니다. 2인분부터 시작하는 메기매운탕을 먹으러 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 주변을 수소문해봐도 다들 싫단다. “ 메기매운탕은 그냥 싫어. 메기는 못생긴 데다 미끌미끌 끈적끈적하잖아.”


하지만 난 메기매운탕을 꽤나 좋아한다. 맛을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메기매운탕이라는 단어 그 자체를 좋아한다. 운율이 느껴지는 글을 선호하는데, 메기매운탕은 뭔지 모를 라임이 느껴져서 좋다. 메기매운탕. ‘메기 매운’까지 입 안에서 동글동글 굴리다 ‘탕’에서 파열음으로 팡 터지는 느낌이 재밌다. 또 메기가 괜히 외국 팝가수 이름 같기도 해서 마음에 쏙 든다.


특히, 그 무엇보다 메기매운탕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당당함이 좋다. 보통의 음식은 재료와 조리법의 단순한 조합이다. 된장 + 찌개, 동태 + 전. 하지만 메기매운탕은 재료 + ‘정체성’ + 조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달거나 짠 건 내가 아니야. 나는 매운탕이니까. 100마일 패스트볼로 거대한 서양인 타자를 픽픽 쓰러트리는 오타니처럼 호쾌한 작명법이다.


쉽게 말해 메기매운탕과 상대하려면 된장찌개 정도론 충분치 않다. 적어도 된장 ‘정성을 담은’ 찌개 이거나 동태 ‘노릇하게 구운’ 전 정도는 돼야 견줄 만하다.


세상 모든 대상이 메기매운탕처럼 분명하게 정의된다면 좋을 텐데. 그럼 종종 마주하는 김치 ‘싱거운’ 찌개를 먹고 실망할 일도 없고, 여자 ‘사람’ 친구와 여자 ‘사랑’ 친구를 구분하는 일도 참 간편할 텐데 말이다.



2.


메기매운탕의 주체적 작명법은 가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얼마 전 독서모임에서 마주했던 질문을 잊지 못한다. “성재님 무슨 일 하세요?” 잠깐 머뭇거리다, 사회적 답변만 툭 던졌다. “인사팀 직원으로 일합니다.”


직무와 직위의 합. 메기매운탕에 비하면 이 얼마나 비겁한 대답인가. 고작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말로 내 정체성을 규명하려 하다니.


질문을 확장시켜, 매운탕에서 ‘매운’이라는 단어처럼 널 정의하는 말이 뭐냐고 물으면 문제는 조금 더 어려워진다. 사람은 다들 일종의 존재론적 결핍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누군지 설명하는 것은 수천 페이지 원고지로도 모자랄 것 같다.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날 규정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아탐구에 있어서만큼은 문맹에 가깝다.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도 같은 고민을 했던 거겠지? 서양엔 메기매운탕도 없을 텐데 이런 발상을 하다니, 과연 천재적이군.




3.


나는 오늘도 내 세계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글을 쓴다. 사람과, 사물과, 그들을 칭하는 단어와 활자를 채에 곱게 거른다. 반짝이는 것이 나오면 깨끗이 닦고, 찬찬히 관찰하고, 살짝 깨물어보기도 한다. 좀 위험하다 싶으면 간격을 벌리기도 하고. 그렇게 노련한 복서처럼, 그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이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세상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일종의 문학적 독도법이랄까? 북반구에선 북극성을, 남반구에선 남십자성을 이정표 삼지 않는가. 나에겐 그게 메기매운탕인거지 뭐.


그러니까 어디 보자. 메기매운탕으로 좌표 찍자면, 마음속으론 메기매운탕을 동경하지만 적당히 사회화되어 자신을 인사팀 직원이라 평범히 소개하는, 다분히 반항적이고 알맞게 비겁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4.


... 뭐라고? 그래서 대략적인 위치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실존적 결핍이 채워졌냐고?


것 참 예리하긴.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아직 요원한 일이다. 이런 글을 수십 편은 더 써야 닿을 수 있으려나? 북극성은 북위만 알려주지 않던가. 하늘을 북극성 같은 별들로 빽빽이 수놓고 나서야 내 정확한 방위를 가늠할 수 있을 테다.


어쩌면 평생 닿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 위치를 어렴풋이 파악했다 싶을 때면 난 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더라고. 거북이를 평생 따라잡을 수 없는 제논의 역설처럼 아마도 끝없이 목표를 향해 달리기만 하다 끝날지도.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는 메기매운탕처럼 당당히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글쓰기를 좋아하는 직장인입니다. 이렇게 글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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