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월간 에세이
1.
Y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있길 즐겨했다. 호수에는 오리가 무리 지어 돌아다녔고, 버드나무가 길게 늘어져있었다. 그러한 목가적 분위기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공능이 있었다.
Y는 호수를 바라보며 오리처럼 물 위를 거니는 상상을 했다. 물에서 내려다본 호수는 어둡고 깊어서 바닥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자아냈다. 수면 위를 방황하던 Y는 호수에 머리를 담근 뒤, 이내 몸까지 다 욱여넣고, 태곳적 어머니의 몸속에 있을 때처럼 사지를 둥글게 말아 웅크린 채 물속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다.
호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를 때쯤, Y는 가장 깊숙이 숨겨둔 감정을 대면했다. 그것은 다양한 얼굴을 지녔다. 언젠가는 슬퍼하는 아버지였고, 어떨 땐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은 D였다.
2.
D는 이상한 주사가 있었다. 그것은 2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시작은 신발을 벗는 것이었다. 특히 한 겨울에 증상은 심해졌다.
유난히 힘들거나 신난 날, 있는 힘껏 취한 D는 마중 나온 Y를 보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진다. 문자 그대로 버선발로 달려온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아스팔트는 사납게 냉기를 내뿜는데, D는 반가운 마음으로 추위를 잊는다. 어쩌면 폭신한 눈의 감촉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Y는 미간을 찌푸린다. D의 발이 상할까 걱정되기도 하거니와, 그 뒤에 이어질 미래를 슬쩍 내다봤기 때문이다.
맨발로 와다다 달려온 D는, Y 앞에 도착해 히히~ 웃고선 그대로 드러눕는다. Y는 한숨을 토해낸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배를 보이며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D가 누워있다. 대자로 양팔 양다리를 쭉 뻗었다. Y는 그 모습이 쭉쭉이 해 달라 조르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황당한 마음에 헛웃음만 튀어나온다. 이 깜찍한 생명체를 어이할꼬.
한번 누운 D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았다. D는 잠든 채 영면에 든 사람처럼 평안했다. 눈 속에 고요히 파묻힌 모습이 혹시 눈에서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Y는 그녀가 그토록 평온한 이유가 궁금했다. 백설(白雪)의 차가운 포옹이 좋은 것인지, 지긋이 내려다보는 Y의 관심이 고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시리게 얼어붙은 달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Y는 생각했다.
처음에 Y는 D를 억지로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저항이 극심하기도 했거니와, 술투정 부리는 과정에서 돌부리에 긁혀 다칠 것만 같았다. 알콜에 흠뻑 젖은 D를 부축하는 일은 D의 그 가냘픈 체구에도 불구하고 고된 일이었다. 무엇이든 젖은 건 무거운 법이다.
힘이 빠진 Y는 D 옆에 똑같이 누웠다. 아마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있었을 테고, D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 음, 이렇게 누우니 달이 잘 보이긴 하네. Y는 생각했다. 그렇게 잠깐, 5분 정도 지났을까? D는 Y가 누워있는 걸 봤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D는 Y가 감기에 걸리진 않았을지 걱정됐다. Y는 D가 유리구두처럼 벗어두고 온 신발을 그제야 챙겼다.
D의 주사가 수차례 반복되자 Y는 능숙히 대응했다. 술 취한 D는 드러눕는다. Y는 시간이 있다 생각이 들면 곁에 누웠다. D의 감각은 본인의 추위보다 Y의 추위에 민감하게 반응하니, Y는 이것을 믿고 길바닥에 몸을 던진다. 내 목숨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걱정을 걸고 달리는 이타적 치킨게임이자, 일종의 상호 확증 파괴 전략인 셈이다.
만약, 얼른 들어가야겠다 싶은 날이면 기만술을 사용한다. Y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 D를 비추고 자동차 흉내를 냈다. 그리고 D를 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자기야, 자기야, 차 온다 차!” 그러면 D는 ‘으어으..’ 괴성 섞인 신음으로 항복 선언을 하며 일어났다.
주사를 맘껏 부린 그다음 날. D는 Y의 계란국을 먹으며 항상 물었다. “오빠는 내가 왜 좋아?” 그리고선 주사 때문에 자신을 떠나간 많은 사람들을 늘어놓았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Y가 얼마나 힘들 것인지 말했다. 자신은 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섞었다.
D의 질문에, 주사가 심하긴 하다고, 그래서 가끔은 귀엽다고 말했다. 귀여웠다. 완전한 비무장 상태를 온몸으로 표현한다는 게. 강형욱 훈련사에 따르면 강아지가 큰 대자로 눕는 건 신뢰와 안도감을 표현하는 행동이라 하던데. D의 ‘발랑’은 Y를 보고 난 뒤에만 이뤄지니, 강한 믿음의 증거일 수 있다고 Y는 생각했다.
또, 주사가 너무 심해서 대부분의 나날은 힘들다고 말했다. 특히 Y가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고 했다. 취기와 세차게 이는 칼바람은 Y의 감각을 닫아버린다. 그런 날에 Y는 D를 온전히 보살피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D는 또 길가의 돌멩이가 되어 꽁꽁 얼어갈 텐데. Y는 그러한 두려움이 자신을 지치게 했다고 고백했다.
Y가 감정의 실타래를 끄집어내면 ‘귀엽다’와 ‘힘들다’가 한데 엉켜있었다. 그리고 그 실뭉치를 헤집을 때면 Y도 자각하지 못한 그의 솔직한 심정이 툭 딸려 나왔다. 조금 귀엽고 많이 힘든데, 그래도 니가 좋아.
3.
주사가 없던 날에도 사랑을 검증하는 D의 질문은 계속됐다.
D는 먼저 자신의 진심을 내보였다. “난 오빠보다 딱 하루 더 살고 싶어. 내가 한참 어리고 여자 평균 수명이 남자보다 3년 기니까, 오빠가 10년 치 노력은 더 해야 돼. 내 나이가 좀 더 많았더라면 난 취업도 했을 테고 오빠랑 결혼도 당장 할 수 있었을 텐데. 나중에 손 잡고 같이 죽을 수도 있고 말이야.” D는 그런 점들을 못내 아쉬워했다.
D에게 연인이란 삶에서 죽음으로 나아가는 동반자 같은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답했다. 저승에선 또 죽을 일 없을 테니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있겠다고. 누군가 먼저 가버리면 오래도록 기다려야 하니, 내가 10년 더 살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그렇게 Y는 영혼의 불멸을 향한 에로스적 동반에 기꺼이 동참했다.
D는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캐물었다. Y의 진심이 보일까 두려워 눈은 피하면서, 마치 살인범한테 자수를 권하는 사람처럼 성의 있고 담담하게 심문했다.
D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은 Y에겐 너무나 어려웠다. 밝은 성격 때문에 좋다고 말하려다가도, 짜증 내는 D를 떠올리면 그것마저 좋아서, 성격 때문이라는 건 제대로 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뽀얀 피부나 눈망울 때문일까 싶다가도, 주름진 얼굴과 감긴 눈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둘 세고, 또 정반대의 모습을 마음에 담다 보면 모든 게 이유가 되고, 또 그 무엇도 이유가 되지 못했다. 결국 Y는 별다른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좋아한다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D는 Y의 ‘그래도’를 싫어했다. D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싫어할 이유 투성이었기 때문이다. D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D의 주사가 싫어서, 박복한 집안이 싫어서, 지나치게 활발한 성격이 싫어서. 그래서, D는 Y의 ‘그래서’를 찾아 헤맸다. Y는 어떤 이유로 자신을 떠나갈지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D는, Y가 D를 싫어해야 할, 그들이 헤어져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잔인하게 해부했다. 배를 가른 과감한 손길로 겉과 속을 뒤집어 내면을 드러냈고, 끝끝내 내장마저 헤집었다. ‘문드러진 속내와 검은 피를 봐. 이게 날 싫어해야 할 이유야.’ D의 불안과 주사는 Y를 힘들게 할 테니까. D는 취준생인데 Y는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니까. D는 뭐든지 부족하고 모자라니까. 수준도 상황도 다른 우린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Y는 반문했다. 설령 그게 다 맞다고 쳐도, 그래도 D가 좋다고. 그래도 헤어져야 하냐고 물었다. D는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고 답했다. Y는 끝나지 않는 ‘그래도’와 ‘그래서’ 사이에서 좁힐 수 없는 간격을 느꼈다. Y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라 생각했고, 힘겹게 끝을 말했다. D의 얼굴은 약간 밝아진 듯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절망적인 예언이 뒤늦게나마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불행한 예언자였다. Y는 D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나서야 간신히 얻은 자조적인 안도감을 보았다.
비관으로 자신을 찌르는 그 모습이 가시를 안으로 세운 고슴도치 같다고, Y는 생각했다. D가 주사를 부리면 Y는 냉기 어린 바닥에 누웠고, 그럴 때마다 D의 죄책감은 가시처럼 그녀의 폐부를 꿰뚫었다. 연인의 감각은 서로를 향할 때 더 예민하고, 안으로 난 상처는 곪기 마련이다. 그녀의 문드러진 속내와 검은 피는 예민하게 곪은 상처에 Y의 무심한 시간이 더해진 흔적이었다.
Y는 선혈처럼 쏟아진 죄의식에 흠뻑 젖으며, 그녀의 고통을 그제야 나누어 겪었다. 작은 죄책감에도 크게 상하는 D의 말랑한 마음이 너무도 어여뻐서, 익애 속 피범벅이 된 Y는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엎드리지 않고선 몸을 가눌 방법이 없었다. 무엇이든 젖은 건 무거운 법이니까. D 역시 함께 누워 울었다. Y가 언젠가 만취한 D를 위해 그랬듯이.
D가 떠난 뒤에도 Y는 한동안 엎드려 있었다. 둥근 팔짱 사이로 물이 고여 호수를 이뤘다. Y는 점점 경계를 넓혀가는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D가 고한 이별에 순응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D를 좋아한다고.
4.
Y는 깊고 깊은 생각의 호수 속에서 빠져나왔다. 흠뻑 젖은 채 수면 위로 올라서니 축축한 옷가지는 불어오는 바람을 더욱 선명하게 했다. 산들바람은 잠깐 몸을 스치곤 첫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 마치 바람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선명한 바람의 감촉과 거짓말처럼 사라진 바람을 두고 Y는 생각했다. 지나간 바람이 호수에 존재했다 말할 수 있나? 호수는 이토록 넓고, 바람은 그리 허무한데.
그렇다면 D는 어떠한가. 최근 Y는 D를 떠올리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표정이나 얼굴은 물론, 그녀의 충격적인 주사조차도 애써야 겨우 생각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D의 모습이 꿈결처럼 아득해 기억도 감정도 희미해졌는데. 언젠가 희미함마저 사라지고 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영영 사라지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은, 심지어 온몸을 내던진 사랑까지도, 본래 무의미한가.
Y는 말없이 호수만 바라보았다. 바람은 수면을 간지럽히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호수에 잔잔한 파동이 일었다. 작은 동심원은 끝도 없이 커져 호수를 뒤흔들곤 사라졌다.
Y는 한동안 되뇌었다. 쉬이 사라지는 바람이라도, 바람이 물을 스칠 땐 물결이 인다. 흔적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