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 준비와 합격
해리포터가 유행하고 있었다. 나는 기숙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때 있던 기숙사 학교는 (내가 알기로는) 외국어 고등학교와 과학 고등학교 두 개였다. 그런데 외고는 우리 집에서 너무 멀었고 나는 그때 의대를 가고 싶었기 때문에 과고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아주 단순한 의사 결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당돌했다. 봄에 자퇴, 여름에 검정고시, 가을에 입시 준비를 시작하고서 겨울에 합격을 꿈꾸다니. 나는 나이가 한 살 어리기도 했거니와 과학고를 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과학고는 영재들의 집합소 아닌가. 들어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영재 교육을 받고 중학교 때 경시대회 입상 경력이 있는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나처럼 시골 동네에서 벼락치기로 중학교를 끝낸 사람이 넘볼 곳은 아니었다. 조기 교육을 받은 애들도 과고 입시를 따로 준비한다는데 중학교 1학년 때까지도 소문자 b와 d를 헷갈렸던 내가 그 입시를 준비한다는 건 뭐랄까 체급이 안 맞는 모양새였다. 무엇보다 나의 특이한 이력. 과연 중졸 검정고시 마크를 달고 입학 원서를 쓰는 아이가 과학고 역사상 있었을까. 설령 내가 실력이 같다고 한들 과연 중학교 자퇴생을 그 모범생 학교에서 받아줄지 의심했다. 나처럼 문제아같은 아이를 말이다.
어쨌든 과학고 홈페이지에서 모집 요강을 찾아봤다. 다행스럽고도 신기하게 중졸 검정고시 합격자도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리고 내신을 검정고시 성적으로 대체한다고 되어 있었다.
목표는 정해졌으니 공부를 시작했으리라. 사실 오래된 기억이라 내가 무슨 공부를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 자세하게 생각나지는 않는다. 어렴풋이 과학고 입학시험에 수학, 과학 구술고사가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경시대회 문제집을 사서 풀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한 달인가 두 달은 빠듯한 형편에 수학 과외를 집에서 붙여주기도 했다. 치대생 여자 선생님이셨는데 엄청 활기차고 잘 가르쳐주시던 분이었다. 수업 첫날에 “어머, 차분하게 생겨가지고 왜 그랬대?”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튀는 아이였다.
고등학교는 ‘정상적으로’ 가는 것으로 부모님과 약속했기 때문에 만약 과고를 떨어지면 학군지의 여고 중 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건 엄마 아빠의 바람이었고, 나는 내심 내가 평범한 고등학교에서 과연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중학교를 못 버텼는데 일반 고등학교를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더군다나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딱지까지 생겼는데 말이다. 덧붙여 학군지의 물가와 엄청난 사교육비를 과연 우리 집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 동네는 엄마가 애들 따라다녀야 한다는데 우리 엄마가 그럴 수 있을까, 엄마가 학원 수업을 못하면 강사 선생님을 써야 하고 그만큼 월급이 나가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과학고를 가고 싶었다.
과학고 입시는 겨울이었다. 시험 전날 잠을 자지 못해서 뒤척이다가 옆에서 자고 있던 동생도 깨워버렸다. 여덟 살이던 동생에게 나의 긴장감을 설명했다. 우리 둘은 침대에 기대앉아 겨울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스티로폼 들어간 합판을 양쪽에 세워 만들었던 우리 자매의 방, 한동안 벽지도 바르지 않았던 그 방이 갑자기 생각난다.
아침은 찾아왔고 아빠의 봉고차를 타고 과학고로 갔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학교 뒤편 공터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쉬었다. 학교 정문에 한자가 새겨진 큰 돌이 있었고 아빠가 그 한자를 읽을 수 있겠느냐 물어보셨다. 모른다고 답을 했더니 ‘궁리’라며 혹시 면접 때 물어보실지도 모르니 알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는데, 그냥 아빠의 그 말에서 아빠 역시 이 학교에 내가 합격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시험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국어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지필고사는 없었던 것 같고 구술, 면접시험이었던 것 같다. 내가 검정고시 출신이라 선생님들께서 나를 날 선 눈으로 보시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느낌은 없었다. 솔직히 서류에서 걸러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감사했다.
시험을 치고 나왔다. 아침보다 제법 날이 풀려있었다. ‘궁리’가 적힌 돌을 지나서 아빠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왔다. 교내에 주차되어 있던 좋은 승용차들을 지나 공터에 있던 우리의 오래된 승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합격을 확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니까 문자 안내 같은 건 없었을 것이고 아마 학교 홈페이지에서 확인했겠지. 나는 그 무렵 집 밖을 나서는 것이 싫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전 글 참고) 그런데 마침 그때 과학고에 합격한 것이다. 세상이 나를 배척한다고까지 생각했는데 나를 받아주는 곳이 등장했다. (심지어 여기는 모범생 엘리트 학교다!) 나는 설렜고 기대했으며 ‘소속’이 생겼음에 안도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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