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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토요일 저녁 # 4-2

나는 어린 시절의 내 꿈을 살아가고 있다

by 됐거든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학원 졸업이 다가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몇 년 사이 더 나이 들어버린 내 부모와, 지금껏 내 빈자리를 지켜주던 동생이었다. 이들이 나를 흔들었다. 세계 평화 같은 것, 국제기구 같은 것, 제도의 변화 같은 것들은 더 이상 나를 두근거리게 하지 않았다. 누군가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 내가 만든 시스템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던 그 목표가, 언젠가부터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지금 내 가족에게 정작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데 다 무슨 소용이 있나. 엄마의 관절염을 몰랐으면서 유니세프 후원 광고에 울컥했던 내가 솔직히 한심했다. 내가 또다시 새로운 선택을 한다면, 그건 내가 도전해 볼 만한 것이면서, 내 일의 결과를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내 가족을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 모든 걸 충족시키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의대라고 생각했다. 나에겐 약학 베이스가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입시 준비가 수월할 테고, 내 판단에 따른 환자 반응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더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알고 보면 장래희망 옆에 가장 많이 썼던 바로 그 직업, 의사가 되고 싶어졌다.


맞다. 사실 나에게는 약학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은 학교를 더 다니고 싶었다. 아이러니하지 않나. 남들 다 쉽게 다니는 중고등학교는 그렇게 힘들어하더니 성인이 되고서 도대체 몇 번의 입학을 반복하는 것인지. 여하튼, 묻어두었던 내 어릴 적 꿈이 생각난 김에 이걸 이루기로 했다.


그때 이미 이십 대 후반이었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의대에 진학하기엔 다들 늦은 나이라고 하던 때였다. 입시 상담을 받으러 가면 늘 나이를 들먹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포기하면 두 번 다신 도전을 못 할 것 같았고, 남은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수험생이 되었다.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일이다. 돌고 돌아 결국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었고 언젠가부터 이것으로 밥벌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때의 꿈이 지금의 나를 배부르게 한다.


나는 이제 거창한 것에 관심이 없다. 나라의 제도 같은 것, 그런 거시적인 것에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 세계 평화나 난민과 같은, 한때 어린 내 마음을 들썩이게 했던 것들에도 이제 무덤덤해졌다. 그저 내 가족과 안정적으로 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킬 것을 지키면서 오늘 하루에 충실하기를, 나를 선택해 준 이 사람들(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꿈꾼다. 더 나아가 나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것, 나의 목표는 단지 그것이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이렇게 돌고 돌아 꿈을 이룬 것이 지극히 ‘나’스럽다는 생각. 갈팡질팡하고 흔들리는 것 같아 보여도 내 안에서 목표가 생겼을 때에는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렇다. 나는 꿈을 이루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내 꿈을 살아가고 있다. 조금 돌아왔지만 결국은 도착했고 중간에 꺾이지 않은 내가 자랑스럽다. 시행착오 끝에 여기까지 온 만큼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더 행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누리면서 즐거워야겠다.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게 나의 새로운 꿈이자 목표다. 30대의 내가 사춘기 시절의 꿈을 이루었듯이, 50대의 나도 지금의 꿈을 이루었기를 기대하겠다. 무조건 이거 하나는 꼭 이루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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