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
벌써 몇 달 전에 썼던 글입니다. 이 날의 주제는 '내 삶의 전시회' 였어요. 가상의 초대장을 한번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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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또 한 번, 자식을 먼저 보낸 이가 있는 자리에 다녀왔단다. 부모가 상주가 된 장례식장이었다. 여느 장례식이었다면 떠난 자와의 추억을 나누어보기도 하겠으나, 오늘 그 자리에서는 그 누구도 망자의 이름조차 꺼내지 못하였지.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있고,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내는 조문객들이 있고,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밝게 웃는 영정 사진이 있었단다. 그 광경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절차가 끝나고 아버지 되시는 분이 너무나 의연하게 이 자리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셨고, 그와 거의 동시에 어머니께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셨단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에게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나는 오늘 아주 오랜만에 너를 생각했단다. 글쎄, 왜였을까. 그런 경건한 자리에서 왜 네가 떠올랐을까. 이유야 어찌 됐든 나는 오랜만에 너를 생각했고 아무래도 너를 내 삶의 전시회에 초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나는 네가 이 초대장을 받을 때에 아주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네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면 이 초대는 니 삶이 이제껏 왜 불행했는지에 대한 답일 텐데, 나는 너에게 그렇게까지 친절하고 싶지 않거든. 나는 네가 아주 대단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기를 바란단다. 너의 그 행복이 과연 어디서 출발했는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니.
내 인생 전시회의 한 코너에 너를 위한 전시관을 마련했단다. 혹시 내가 그림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너를 위한 이곳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20)’라는 그림으로 시작해.
그림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글을 쓴다는 것도 말했었는지 모르겠구나. 아주 가끔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린단다. 그리고 언젠가 글로써 남기겠다는 생각도 하지. 이를테면 이런 거지. 나는 한여름의 뙤약볕과 길을 지나가는 한 노인을 볼 때면 이런 상황을 떠올린단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느 노인이, 상을 치르고 얼마 되지도 않은 어느 날, 기차로 두 시간이 걸리는 낯선 도시에 숨 막히는 더위를 뚫고 혼자 올라오는 거야. 집에는 몸져누운 아내를 두고, 생업도 제쳐두고서 말이야. 노인은 급히 며느리와 만날 일이 있어. 이 며느리는 노인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도시로 그를 불러들이지. 그런데 이 며느리는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단다. 그래서 자식을 잃은 이 노인은 병원으로 헐레벌떡 들어와 이야기하지.
“며느리를 두 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연락이 되지 않는다.”
“당신들은 연락이 되느냐”
이렇게 직원들에게 묻지. 당신 아들이 만들고 머물렀던 그 병원에 뜻하지 않게 들어오게 되는 거야. 그리고 당신 아들 밑에서 일했던 직원들에게, 당신께서 며느리에게 바람맞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하지. 나는 그때 그 노인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그날 어떤 심정이었을까, 아들을 잃고 며느리에게 바람맞던 그 어르신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 가끔 생각한단다. 그걸 그 누구에게라도, 몸져누웠던 아내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해.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지. 세상에 비밀이 없다고 하지 않니. 만약에 그 어르신이 말이야. 아들이 떠나고서도 한동안 본인 아드님 사진이 다름 아닌 너의 병원 홍보에 쓰인 걸 아시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실까 생각하는 것이지. 물론 내가 주제넘은 상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나는 가족도 뭐도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냥 생각은 드는 거지. 공직에 소속된 사람이 남의 명의를 빌려 병원을 인수하고, 본인이 전면에 대표원장으로 나설 수 없으니 예전 원장의 명성을 그대로 이용하는 일, 그럴 목적으로 고인이 되신 분의 사진을 홍보에 이용하는 일. 마치 그분이 대표원장인 것처럼 사람들을 오해하기 만드는 일이 과연 흔한 것인가. 그걸 만약 그 어르신이 아시게 된다면 글쎄, 어떤 느낌이실까. 내가 만약 부모라면 말이야, 살아서 지켜주지 못한 내 아들, 죽어서도 지켜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그리고 너는 그분의 학교 후배가 아니었니. 세상이 참 잔인해 그렇지?
단 두 번 만났던 너를 나는 무수히 생각했단다. 너를 떠올릴 때 기억나는 장면 중에 하나는, 네가 해사하게 웃던 모습이야.
“축하드립니다. 올해 출산도 하시고, 개원도 하시게 되었네요.”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네가 정말 해맑게 웃더라고. 해사하다는 인상을 받았어. 이어서 너는 육아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구나. 너와 치열하고 격렬하게 싸워보고 싶었지만 결국 끝까지 가지는 않았던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때 너의 이 미소였단다. ‘그래, 이 사람도 누군가의 아버지다.’라는 게 내 발목을 잡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