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에서 블루스로 디스코에서 폭스트롯까지

by 윤해



2023.11.29

놀기 좋아하는 한국인들이 엄혹한 시대를 겪으면서 산업화 시대의 워크홀릭으로 변신한 지도 어언 한 세대이상이 흘렀다. 방학 숙제를 미룬 학생이 개학 하루 이틀 전에 숙제를 마치기 위해 밤잠도 설치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우리 세대의 모습이다. 과제를 마쳐야 한다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에 몰두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속에는 손을 놓고 논다는 단어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 어렵사리 구한 팝송을 음악테이프에 복사해서 귀하신 야전(야외전축) 하나 둘러메고 양키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한 에누리 끝에 쌈짓돈을 털어 산 시커멓게 염색된 군복 스몰 바지를 교복 대신 껴입으면 대충 놀러 갈 준비는 되었다.

그렇게 들로 산으로 바다로 틈만 나면 달려 나가 야전에 팝송가요를 틀면 야전이 무인 DJ가 되고 우리 발밑에 잡초, 모래바닥이 바로 자연 고고장의 풀로어가 되어 비비고 찌르고 흔드는 광란의 밤에 더해 야외 랜턴까지 흔들어 싸이키 조명까지 완성되면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 없는 나이트클럽이 완성되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장소 불문 시간 불문 놀기 잘하는 우리들이 한 세대 이상을 일에 파묻혀 살다가 다시 놀이의 세계에 돌아오기 위해서는 출정식에 버금가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관성은 무서운 것이다. 산업화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장착했던 우리들의 습관이 그대로 내 몸에 남아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 없이는 우리는 우리의 습을 놓지 못하고 놓지 못하면 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섭리가 리듬과 박자이듯이 노는 것도 고고춤을 추다가 블루스를 추고 디스코를 추다가 폭스트롯으로 갈아타는 리듬과 박자의 완급조절이 결정적이다. 청춘의 놀이, 댄스도 강약 슬로 퀵퀵이 교차하는데 하물며 노년의 놀이는 이 완급조절이 핵심이다. 정적인 놀이 고스톱에서 최종승자는 누구일까? 패를 잘 받아 고를 잘하는 사람일까 화투판의 사세와 남의 패까지 읽는 것은 물론 남아있는 화투장의 패까지 읽어내는 확률과 통계를 기반으로 스톱을 잘하는 사람일까?

고는 고고를 낳고 고고는 쓰리 고를 낳듯이 사람이 한번 흐름을 타면 웬만해서는 그들을 멈출 수 없다. 멈추는 에너지는 진행에너지 보다 열 배는 더 든다.
그러나 화투판의 최대의 파란은 쓰리고도 광박도 피박도 아니고 고박이다.

고박을 뒤집어쓴 사람의 표정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바로 그것이다. 그 순간 그 사람의 진정한 놀이는 시작되는 것이다. 모든 화투판의 일장춘몽을 뒤로하고 손을 놓고 마음을 놓고 개평이라도 뜯어볼 심산으로 화투판의 관찰자로 뚫어지게 판세를 읽는 경지에 도달할 때 그는 화투판의 궁극적 타짜로 등극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생 직과 업에서 물러나 진정한 백수가 된다는 의미는 손에서 화투장을 내려놓고 개평을 뜯는 관찰자 타짜가 되라는 것이지 또 다른 화투판을 기웃기웃 거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고박의 진정한 의미는 고스톱의 고가 아니라 스톱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작도 어렵지만 일단 시작되어 시간이 경과하면 멈춤도 어려운 관성적 존재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편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직장에서 나오고도 힘이 있는 한 했던 일을 반복하려 하고 심지어 그 일을 그리워하기도 하다가 또 다른 대상에 업을 투사하면서 업을 반복하는 경향이 많다. 이 모든 것이 스톱을 못해서이며 놓지를 못해 놀지 못하는 이치와 닮아 있다.

인생 후반전은 무엇을 덧붙이는 덧셈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고 빼는 뺄셈의 삶에 적응해야 하는 기간이다. 그동안 찬란한 덧셈과 곱셈에 관성이 붙은 생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고박이 얼마나 쓰라린지 조금이라도 짐작한다면 지금의 우리는 손발로 하늘을 찌르는 고고춤을 추던 청춘이 아니라 부드러운 블루스 춤으로 그나마 옆에 남아준 한 사람의 동반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를 두르며 시끄러운 디스코는 끄고 느릿느릿한 트로트 음악에 맞추어 블루스를 한바탕 추는 인생이 더 멋지지 않겠나 상상해 본다.

부언 한마디 하면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흥 하게 건 설하니 흥건하니 젖어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