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라더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은 꿈이런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야은 길재의 시가 문득 떠오른다.
나라나 가정이나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길흉화복과 흥망성쇠를 함께 겪는다.
여말선초 피비린내 나는 망국과 개국의 한복판에서 삼은의 운명은 삼은이라는 호에서 말해주듯이 어디로 멀리 떠나 은거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었지만 혼란한 세상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았고 결국 목은과 포은은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명횡사,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갔고 야은 만이 살아남아 구미 금오산으로 낙향하여 후일을 기약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훗날 기라성 같은 영남 사림학파를 길러내어 조선을 좌지우지하였던 것이다.
나라뿐 아니라 한 가정의 가정사도 길흉화복과 흥망성쇠라고 하는 생략 없는 과정을 밟는다. 나를 기준으로 부모형제는 물론 조부모까지 단란한 삼대를 구성하며 출범한 가족이 다이내믹한 생로병사를 겪으면서 마치 무대의 배우가 1막이 끝나면 퇴장하듯이 하나하나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가고 어느 순간 덩그러니 나이 든 고아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다가온다.
그즈음 인생 2막에 등장하는 배우는 1막 때는 알지도 못했고 심지어 그때는 지구상에 존재치도 않았을 배우와 하루하루 치열한 연기를 하고 나면 문득문득 두고 온 인생 1막의 무대와 소품이 보고 싶어 백리를 한달음에 달려가는 곳이 바로 그리운 고향집이다.
부모형제라는 인걸은 간데없고 가족 삼대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태평연월은 아득한 꿈이 되어 버린 지금 앞마당에 피어있는 무궁화만이 이름 그대로 무궁하게 은은한 자태를 뽐내고 어디서 옮아온 지 모르는 진드기를 잔뜩 뒤집어쓴 멍멍이 만이 우리를 반긴다.
야은 길재가 망국의 수도 개경을 둘러보며 느꼈던 심정이나 우리가 두고 온 고향집을 둘러보는 심경이나 매 한 가지로 인생무상을 느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우리는 이 순간 시간의 덧없는 흐름을 비로소 느끼고 아울러 시간의 무자비함에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두고 온 고향집을 찾아가는 행동은 시간을 거슬러 타임머신을 타고 두고 온 시간을 온전히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욕구의 발로 인지도 모르겠다. 비록 아무리 타임머신을 타고 가도 1막에 등장하는 배우가 되살아 나지는 않지만 고향집과 무궁화, 멍멍이라는 무대의 배경이 존재하는 한 우리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배우를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늘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 잡는다.
감나무가 지키고 있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나온 우리들 누구는 당대에 누구는 대를 너머 도시에 정착했다. 그 도시에서 어떤 인생을 연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늘 두고 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 이제 그 고향이 감나무가 지키는 시골 앞마당에서 고층 빌딩이 즐비한 도심의 차가운 거리로 옮겨올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두고 온 고향이 시골이 되었든 도시가 되었든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고향의 주인공은 우리 같은 인걸이 아니고 감나무와 빌딩과 같은 의구한 산천이라는 불편한 진실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 앞에서 한편으론 아연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월의 무상함을 어즈버 태평연월의 꿈으로 표현한 길재의 시에 공감하는 것은 세상이라는 공간도 시간이 무심히 흐르면서 기억 속에 파묻히기도 하겠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추억으로 소환되어 늘 우리 인간의 가슴 속에서 생명으로 재탄생된다는 점 때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