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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Apr 22. 2024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고, 세포가 모여 나를 만들었다


2024.04.22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 일단 시각 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보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래서 서양 속담에도 Seeing is believing 이란 말이 있다.


 그러면 본다는 의미를 일단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본다고 하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을 연상한다. 그러나 본다는 의미는 눈이라는 한 지체를 이용해 본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 신세를 못 면하고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을 한탄하는 지경에 놓이기 십상이다.


본다는 것은 근본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근본이란 뿌리까지 꿰뚫어 보고 본질을 파악하는 행위다. 이 행동은 교감 신경이라기보다 부교감 신경에 가깝고 수의근이라기보다 불수의근에 가까운 의식적인 행위라기보다 수억 겁 대를 이어 강화된 무의식의 결정판이요 자동반응인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우리가 한 길 사람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이유는 육근이 청정하지 못해서이다. 육 근이란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여섯 가지 지체의 기능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마치 손으로 얼굴을 씻듯이 자연스럽게 한 길 사람 속이 보인다는 법화경의 진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시각 문명을 극대화하여 눈 뜨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 귀를 마비시켰고, 눈 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을 만나 비근을 마비시켰고 눈 뜨고 혀를 잘못 놀려 설화를 당하고, 눈 뜨고 몸을 함부로 굴려 말초적 촉각에 무너지기 쉽고, 눈 뜨고 그릇된 이념에 경도되어 의식을 더럽히는 경우를 다반사로 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근본이  눈 뜨고 사는 동안  갖가지 왜곡과 욕심과 사심으로 덧칠되고  흔들리면 사람의 마음을 알 수도 살 수도 없는 지경에 도달해 사람이 모여사는 세상은 늘 알쏭달쏭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햇깔려서 캄캄한 세상에서 나를 알아보고 너를 알아보는 행위는 단순히 한 사람을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육 근을 총동원하고 갈고닦은 결론이므로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어도 끊임없이 사심과 욕심이라는 색안경으로 남을 보기 쉽지 청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보기는 너무나 어려우므로 한 사람의 마음도 근본은 결코 눈 뜨고 보고 있어도 볼 수 없는 시각문명의 역설적 저주에 놓여 있다. 이 저주를 풀려면 육근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수용체로서의 나와 발광체로서의 나를 어느 정도는 일치시켜야 하는 숙제가 있다. 즉 내가 너를 바라보는 수용체로서의 나는 유리알 같이 너를 보고 있지만 너에게 보여주는 나는 온갖 갑옷과 덧칠로 중무장하여 왜곡에 왜곡을 더해 발광하는 것이다.

이 인지부조화는 또다시 수용체로서의 나를 왜곡하고 결과적으로 육근이 더럽혀진 체로 너를 바라보는 인지부조화의 예술을 기가 막히게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분이 모여 전체를 만들 듯이 세포 하나하나가 우리를 구성하고  궁극의 나를 완성하지만 전체가 된 나도 결국 부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는 동안 세상의 부분인 너와 나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라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과 숙명을 가진 우리가 눈 뜨고 서로가 서로를 보고 근본을 알고 교유한다는 것은 드물고도 드문 인생의 축복이며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의 행복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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