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지난 한세대 동안 세계가 지구촌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가까워졌던 적이 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10만 년 전 한 무리의 부족이 아프리카를 떠나 중간중간 절멸의 위험을 기적적으로 극복하고 서쪽으로는 유럽 , 동쪽으로는 중동을 거쳐 아시아와 베링회랑을 지나 남미 끝까지 진출한 호모사피엔스의 디아스포라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전지구적 흩어짐과 동시에 적게 잡아도 수만 년에 걸쳐 일어난 인류의 지구환경 적응의 대서사시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수만 년 동안 지구 곳곳에서 개별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킨 호모사피엔스들은 그 발전시킨 문명의 한계로 인해 전지구적 관점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에는 문명의 도구가 미약했으므로 자연이 가로막은 대양과 산맥에 가로막혀 독자적인 문명을 구축할 수밖에 없었다.
흩어지면 모이고 모이면 흩어지듯이 수만 년에 걸쳐 흩어져서 지구 곳곳에서 독자적 문명을 건설한 호모사피엔스의 로컬화의 종지부를 찍고 나타난 몽골초원의 정복자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을 통해 아시아와 유럽이 연결되었고 한번 연결된 동서양의 문명은 때때로 제국의 세력의 부침으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했지만 인류문명의 방향이 늘 그러하듯이 한번 맛본 연결의 달콤함은 잊을 수없는 엔도르핀으로 작용하여 오스만 튀르크가 끊어 놓은 동서양 교역을 연결키 위해 더욱더 갈급했던 유럽의 서양은 미지의 대양을 향해 일엽편주를 띄웠던 것이다.
1492년 8월 3일 에스파니아 팔로스항을 떠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 나냐호, 핀타호 세척의 출항은 드디어 호모사피엔스가 대양이라는 지구적 장애를 넘어서 바다를 통해 전지구를 연결시킨 대장정이라는 것을 콜럼버스를 비롯해 당대의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이들은 황금과 향신료를 찾아 일확천금하겠다는 욕망이 이끄는 데로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난관을 딛고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신대륙이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인도는 아니었지만 신대륙의 황금과 자원이 아니었다면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대양정복이라는 전 지구적 벨트를 완성하여 마침내 서양이 동양을 넘어서고 문명의 중심 헤게모니를 확실히 쥐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표면적인 세계사는 이렇다. 무엇 때문에 동양은 서양에게 문명의 헤게모니를 넘겨줘야 했을까. 분명 13세기 칭기즈칸에 의해 무참하게 정복당하고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비와 요행에 기댔던 서양이 이백 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동양을 능가한 실력자가 된 것은 무엇일까?
용병은 넓게 보면 품을 파는 사람이다. 고용계약을 하고 품을 사는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버려야 되는 사람을 용병이라고 한다. 스위스 용병의 목숨을 내놓은 처절한 계약 이행은 어쩌면 서양정신의 정수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품팔이가 가능했던 것은 한 장의 종이로 전제왕정을 종식시킨 마그나카르타에서 부터 콜럼버스 선장이 선원과 맺은 고용계약서까지 계약은 그 누구도 파기할 수 없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믿음과 궤를 같이하는 중세시대를 거친 서양만이 오로지 도달할 수 있었던 가치체계 였다.
그에 반해 충효라는 정성적 가치체계에 기반한 동양은 품팔이가 아닌 품앗이 문화이다. 두레 향약과 더불어 정에 기반한 상부상조의 전통은 나라를 지키는 국방에서도 대를 이어 돌아가며 국경을 지키고 번을 선다는 품앗이 전통을 당연시 여기는 우리가 품팔이 용병기업이 러우전쟁을 수행하는 해프닝을 보면서 생소하고 어색함을 느끼는 것은 동양적 정서를 가진 우리로서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것이 서양의 힘이다. 이 힘 하나로 우리 동양은 서양에게 헤게모니를 뺏긴 것이라면 과연 지나친 비약일까?
이미 우리 자신들도 품을 팔고 품을 사는 서양인이 다 되었다. 핸드폰 하나 사더라도 장황한 계약서를 빼꼼히 적어야 하는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상부상조의 품앗이 문화를 그리워하는 인지부조화의 실체가 오늘을 사는 우리 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