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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Dec 16. 2023

그것만이 내 세상, 노래만이 내 세상



2023.12.16

빈부격차 지위고하 남녀불문 세대불문하고 사랑받는 것이 노래다. 음악과 노래는 어쩌면 인류, 나아가 지구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비록 우리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면서 물고기의 눈과 같이 옆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시각 문명 위주의 인류 문명을 일으켜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청각과 시각의 서열은 글과 말이 아닌 말과 글이 듯이 먼저 듣고 말하고 그다음 보는 것이다. 이처럼 비록 세상이라는 시각문명 속에 우리는 살고 있지만 사람의 본능 속에 감추어진 듣고 노래하는 흥얼거림은 원초적 본능에 가까운 뿌리 깊은 것이다.

귀라는 지체는 입과 눈과 같이 선택적으로 열고 닫는 지체가 아니다. 귀는 항상 열려 있다. 우리 얼굴에 귀와 비슷한 지체가 코이다. 3분만 숨을 쉬지 않으면 숨을 거두는 생명체의 입장에서 코가 열려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귀는 왜 항상 열려 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성경을 인용하지 않아도 소리를 듣는 귀의 기능은 생명이 수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가장 오래 기능하는 감각기관이 청각기관이며 듣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초적으로 듣고 말하는 소리의 세계에서 진화하여 말을 만들어 소통을 하고 말에 리듬과 박자를 입혀 운율을 더한 흥얼거림이 음악이 되고 노래가 되면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사냥터에서도 심신을 위로받는 감정을 만들어 내어 몸과 마음을 그다음 날 날이 새기 전에 회복한 우리 인류는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층세상이다. 한 세상을 산다 해도 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극히 일부분뿐이다. 우리가  시각 문명을 발전시켜 미디어를 통해 천리만리를 본다 하여도 미디어 카메라가 비추는 극히 일부분의 편집된 영상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마간산 같은 부분만을 보는 시각문명은 자연을 닮아 전체인 사람의 본능에 위배된다.

이러한 시각문명의 한계를 채워주는 것이 음악의 힘이요 노래의 역할이다. 그래서 노래는 빈부 지위 남녀노소 세대 불문이다. 즉 묻고 따지는 시각문명의 차가운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청각문명의 따뜻한 감성의 세계인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로 시작되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시절의 새마을 노래를 들으며 학교를 갔고 교정에 들어서면  빠짐없이 들려주던 서양 행진곡들에 맞추어 등교를 하였고 하루도 빠짐없이 거행되는 국기 게양식과 하강식에 흘러나왔던 지겹도록 들었던 애국가, 대학교에 입학한 그해 민주화를 향한 데모대 사이로 잠시 잠깐 울려 퍼졌던 민중음악을 뒤로하고 군입대 하자마자 지겹게 외웠던 비장했던 군가를 마지막으로 우리 인생의 공식 노래는 마감을 하고 고고 디스코에 이은 발라드 트로트의 열풍이 유행가로 거리를 활개치고 가끔 씩 터지는 올림픽 개막곡 손에 손잡고 가 우리를 설레게 했고 월드컵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가 우리를 환호하게 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다면 노래만이 내 세상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 정도로 노래와 음악은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사는 세상에 스피커를 통해 새마을 노래도 애국가도 손에 손잡고도 오 필승코리아도 심지어 크리스마스 캐럴도 우리들의 광장에서는  들을 수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두의 귀에 꽂힌 이어폰 리시버를 통해서만 노래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시각문명의 결과가 시력을 훼손했듯이 이제 그나마 남은 우리의 원초적 본능 청각능력마저 스마트폰 블루투스 이어폰에 혹사당해 다음세대 난청을 걱정해야 하는 요지경 세상도 노래만이 내 세상이라 소리치기 전에 생각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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