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태어나는 것이 낳는 것이라면 노는 것은 놓는 것이다.
들어간 것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 있듯이 잡는 것이 있어야 놓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취직을 하고 수많은 난관을 뚫고 실직의 공포를 극복하여 드디어 무사히 퇴직을 하게 되면 감개가 무량하리라 짐작된다.
조직이라는 보호막에서 그 보호막을 걷어내고 홀로서기를 하는 것은 마치 기어 다니다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돌 지난 애기가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조직 내에서의 나와 조직을 나온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일단 하나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나가 결정하고 나가 책임져야 하는 야생의 삶으로 들어간 것이다.
조직은 조직 나름대로 생명이 있다. 조직 내에 있을 때는 그 조직의 생태에 올라타기만 해도 거대한 선박이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듯이 굴러가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오는 결과치라는 것이 나타난다.
조직을 나온 나는 내가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성공시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유리지갑이라 불평해도 월급이라는 한 달에 한번 맞는 마약과 같은 중독성 강한 주사가 조직을 나오면 전혀 없다. 오히려 빚을 잔뜩 지고 마이너스로 시작되는 삶을 시작해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 나아가 등뒤에서 칼 들고 쫓아오는 듯한 빚쟁이들의 매달 매달 청구되는 이자, 두 달만 연체해도 어마어마한 연체 이자, 그리고 살인적인 사채이자까지 온갖 세상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 허우적거리다가 거미줄에 돌돌 말려 꼬치가 되어 거미에게 때마다 그나마 남은 수액을 빨릴 때 즈음 어디선가 홀연히 적벽대전의 동남풍이 불어와서 가까스로 거미줄에서 떨어져 나와 몸을 꽁꽁 싸던 거미줄을 툭툭 자르고 일어나면 그제야 사업가의 데스밸리를 무사히 건넜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업가에게 있어서 데스밸리를 건너는 일은 생략할 수도 건너뛸 수도 없는 선택지 없는 관문이다. 다만 여기서 생존하느냐 엎어지느냐의 무자비한 결과 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도망도 갔지만 궁극적으로는 싸워 이겨야 그다음 고개로 올라갈 수 있는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조직밖의 세상은 그야말로 혼돈과 야생의 밀림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시운을 제대로 만나 거미줄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대붕이 되어 날아갈 수도 , 거미줄에 온몸이 꼬여 꼬치가 되어 껍데기만 남아 털리는 신세가 될 수도 용케 비바람이 불어 거미줄이 끊어져 땅에 떨어지면서 요행으로 살아날 수도 , 갖가지 행운과 불운의 희비쌍곡선이 교차하는 곳이 조직 밖에서 분투노력하는 사업의 세계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빚을 내어 자본을 만들고 그 자본을 던지는 투자를 하고 이자를 내고 손익분기점을 돌파할 때까지 근근이 버티고 그 사이 일어나는 온갖 악재를 이리저리 메꾸면서 자기도 모르는 행운으로 데스밸리를 건너고 생환해 나가는 사업의 세계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삶이며, 뺏고 뺏기는 제로섬 게임이며, 운칠복삼의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장이다.
살아난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기도 어려운 삶이 사업의 세계다. 그러다가 힘 빠지면 내려놓고 삶의 현장에서 누가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발적 은퇴를 슬그머니 하게 되면 그나마 운 좋게 업에서 해방된 사람이라 부러워하는 것이다.
조직에 뽑혀 조직에서 한세대 동안 열심히 살다가 우여곡절은 많았겠지만 모두의 축하 속에 명예롭게 퇴직하는 삶은 제대로 축복받은 삶이다.
나머지 여생도 이 축복의 관성이 이어지기를 기원하고 행여 거미줄을 끊고 북극의 곤이 대붕이 되어 하늘을 날면서 3천 리 물결을 튀고, 6개월을 날며, 9만 리를 올라가는 369게임은 그동안 조직 속에서 누렸던 자신의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이라는 것을 나만 모를 수 있다는 자각을 한 번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그 게임은 세상이란 놀이터에서 은퇴하고 나만이 구축한 메타버스에서나 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놓을 때 놓는 사람만이 축복을 이어나가는 대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