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6
태양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조상, 원시인류 입장에서는 동지에 힘을 잃고 흐릿하게 사라지는 태양을 보면서 극심한 공포와 걱정으로 삼일 밤낮을 전전긍긍하다가 크리스마스 아침에 맞이하는 찬란한 태양은 분명 희망의 시작이요 힘찬 출발의 서곡이라고 느끼고 환호했을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광야를 벗어난 아하스 페르츠와의 다섯 번에 걸친 만남 중 첫 번째, 바위산 기슭에서의 만남에서 예수는 "배고픈 자에게 빵을 줄 수 있는지" 묻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이렇게 답한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는 허약한 육체와 영혼으로 고통받고 방황하는 인간을 위해 빵과 기적과 권세를 요청하였으나 신의 아들 예수는 신의 권능을 보여주기 위해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아하스 페르츠의 요청을 거절한다.
동지의 어둠에서 크리스마스 아침에 태양의 부활처럼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사람의 아들인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 속 어둠에서 세상의 빛을 타고 태어난 태아의 본능과도 같은 모습이 사람의 아들로서 세상에 나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도의 길이 아닐까?
이렇게 어둠에서부터 빛을 향해 나아가는 본능은 태양계를 살아가는 생명체로써 당연히 부여받은 것 이겠지만 사람의 아들이 자연에서 빠져나와 문명을 건설하고 실체적인 자연의 언어를 추상적인 문명의 언어로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사람의 아들들이 자연과 직접 대화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신으로 대체하면서 자연에 대한 수많은 왜곡과 덧칠을 거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모습이 우리가 세상에서 조우하고 있는 신의 모습이다.
태양계에서 자연으로 존재하던 수많은 신들이 중동의 사막에서 유목민의 유일신 야훼로 정립되는 과정의 신의 말씀이 구약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복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아들, 인간들의 타락이 도를 더해 마치 동지와 같이 해가 깔려 하나님의 말씀이 헷갈릴 때 즈음 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세상을 밝히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신약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들에게 구원에 대해 보다 많은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고 한다면 신약의 복음은 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의 종교로 거듭났다.
이문열의 장편소설 사람의 아들에서 등장하는 민요섭과 조동팔의 악연에서 보여주듯이 아하스 페르츠와 같은 사람의 아들이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마주치는 신의 아들, 예수의 존재는 사람의 아들로서 도저히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존재이다. 이 신과 사람의 간극을 파고드는 사탄과도 같은 존재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암약하고 활개 치기 마련이다. 그 사탄의 모습은 민요섭과 같은 사람의 아들로서 할 수 있는 한계치까지 선을 추구할 수도 있고 아하스 페르츠 같이 신의 아들의 모습에 실망하여 방황하고 갈등하는 영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다다를 수 있는 종착점에서 신의 모습을 확인한 사람의 아들들의 충격과 허탈감에서 신은 믿는 존재이지 확인하는 존재가 아님을 절감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육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아들과 영적 존재로서 신의 아들의 모습을 함께 생각하며 자연에서 빠져나와 문명을 살고 있는 우리가 자연에서 유리되는 과정에서 생략되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돌아가야 할 구원과 믿음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에 생각을 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