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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Jan 04. 2024

 원본은 자연 사본은 세상



2024.01.04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피아의 구분도 참 거짓의 구별도 미추의 분별마저 헷갈리고 아리송해지기 마련이다.

18세기 조선의 화풍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을 필두로 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가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진은 무엇이고 경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진은 참이고 경은 거울이다. 세상을 사는 우리는 참 하면 따라붙는 말이 거짓이지 참과 거울은 어찌 생소해 보인다. 더구나 조선시대 화풍을 이야기하고 진경산수화를 보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가는 면은 없는지 한번 짚어보자.

삶과 죽음을 일회성으로 보지 않고 생명줄의 영원한 연장선 상에서 우리를 보면 우리는 우주 안에자연의 생명을 입고 지구에 왔다. 지구에 와보니 사람으로서 살기보다는 세상 속의 인간으로서 사는 삶을 살게 되고 이 세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은 생명계의 시간과 공간감으로 보면 지극히 미미한 것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 속을 사는 동안 가장 많이 하는 사고나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른 말들을 사용할 때 어디에 비추어 보면 무엇에 비추어 보면 다른 사례에 비추어 보면 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경우를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된다. 그냥 보고 그냥 말하고 그냥 생각하고 그냥 행동하면 되지 왜 모든 것을 비추어 본다고 했을까?

비추어 보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살면서 의심해 보는 사람은 드물다. 비추는 것도 다양하다. 햇빛을 비추어 보기도 하고 달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고 별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지만 어디에 비추어 보아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반사되어 돌아오는 거울면을 보는 것이지 참모습을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생명계라고 하는 영원이 지배하는 무한대의 시간이 만들어 놓은  자연이라고 하는 무대가 엄존하고 있고 우리 인간은 자연의 무대에서 한낱 단역에 불과한 배우로서 세상이라는 약속된 연출에 의해 연기를 하는 단역 배우에 불과하다.

무대의 특성은 주연 배우를 비롯한 핵심 배우들이 거의 대부분의 대사를 하면서 극을 주도한다. 단역 배우는 한쪽 구석에 조신히 몸을 사리면서 대부분의 역할은 극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주연 배우의 대사를 듣는 것으로 역할이 족하다.

이것이 우주라고 하는 거대한 생명계가 꾸미는 자연의 무대에서 우리 인간이 부여받은 배역이다. 즉 느끼고 듣는 역할이 우주 속에 놓인 인간으로 우리가 연기해야 할 섭리(攝理), 즉 귀 세 개를 열어 놓고 자연이라는 무대의 주인공들의 대사를 듣고 듣고 또 듣고 하라는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만족을 못한 우리 인간이 꺼내든 것이 자연의 언어가 아닌 독자적인 인간의 언어를 개발하여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빠져나와 세상이라는 거울을 만들어 자연의 무대에서 연기하여야 하는 섭리를 어기고 거울을 비추어 보며 인간의 언어로 참 거짓을 세상을 사는 동안 치열하게 주인공으로서 원도 한도 없이 대사를  하고 연기를 하는 모습이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아닐까?

16세기 17세기 왜란과 호란의 참화를 겪고 퇴계와 율곡의 유학의 정점을 지나 영 정조 시대의 실학사상과 더불어 진경산수화의 기풍이 몰아친 조선 후기의 시대상황이 우연한 것은 아니다.

세상 속의 인간으로서 세상이라는 거울을 비추어 보면서 열심히 대사도 하고 연기도 하고 살았지만 잇따른 전쟁의 참화 속에서 돌아오는 단역배우의 한계를 절감하고 세상이라는 거울을 밀어내며 자연이라는 무대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실학과 진경산수화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세상의 거울은 동서양이 비슷한지 18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을 통해 서양은 아예 단역배우라는 역할을 단숨에 털고 나가 자연의 무대에 주인공의 자리마저 탈취하여 자연의 거대한 무대로 진출하고 농업혁명 이래 가지고 있던 단역배우의 거울을 과감히 갈아 업고 자연의 무대를 차례차례 점령하면서 서세동점의 부차적인 전리품마저 챙겼다.

막스 플랑크가 20세기 양자물리학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이래 수많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무대로 나아가 세상의 거울을 자연에 닮게 비추어 보았지만 우리 인간은 한정된 공간과 찰나적 시간을 사는 관계로 우주적 자연의 무대에서 겨우 변방으로부터 한 걸음을 내 디디고 있는 상태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거울이 아무리 완벽해 보여도 그것은 실체가 아닌 거울이라는 엄연한 사실만 알 수 있다면 우리가 고뇌에 빠졌을 때 세상이라는 사본보다는 자연이라는 원본을 봐야 비추어 보지 않고 바로 보는 것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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