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5
속담에 오십 보 백보라는 말이 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란 표현도 자주 쓴다. 고만고만하고 올망졸망한 상태가 만만하기도 하고 유유상종 여민동락할 수 있는 상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하는 환경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느끼기에는 거대하고 깊으며 조밀하기까지 하다. 그 거대하고 깊고 조밀한 지구에 한 개체로서 살고 있는 인간의 감각기관은 그저 보이는 데로 보고 들리는 데로 듣고 느끼는 데로 느끼는 그야말로 제 나름대로 해석한 환상을 뇌세포와 뉴런과 시냅스를 총동원하여 구현해 낸 현실을 마치 진실인양 우기며 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과학의 출발은 일단 의문과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냥 믿는 것은 종교나 이념의 영역이다. 이러한 공고한 믿음을 깨 부수는 역할을 훌륭히 완수한 과학은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미시계를 현미경이라는 문명의 도구를 가지고 탐구해 갔고 인간의 인식범위 밖의 거시계는 망원경이라는 문명의 도구로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문명을 살고 있는 현대과학의 쌍두마차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인류지성의 진보는 모두 다 이 두 가지 도구의 활약 덕분에 이루어졌다. 현미경이 없었으면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의 존재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망원경이 없었으면 우리가 사는 초록별 지구의 모습은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인식체계의 지평을 비약적으로 넓힌 현미경과 망원경은 좁혀도 보고 넓혀도 보면서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지구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만든 문명 자체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감각기관을 총동원하여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보리수나무 아래 고행을 통해 깨달음과 열반의 경지를 추구했고 법화경을 통해 거시계의 지평을 열었고 황제내경을 통해 미시계를 탐험해 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18세기 이후 자연과학자들이 현미경과 망원경이라는 도구를 통해 증명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지체를 타고나서 지극히 인간적인 안목에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정의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우주 삼라만상 중에 극히 일부분 뿐이라는 것을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한정된 음역대에서만 가능한다는 것을 인간이 맡을 수 있는 냄새, 맛볼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부분적이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 내어도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우리에게는 안 보이고 안 듣기고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못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인지세계 밖을 못 느끼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절대적 개념에서는 그냥 존재하며 그 존재가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관계적 존재로서만 우리 개체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관계적 존재라는 말이 우리 인식체계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고 비로소 우리 인간에게 의미적 존재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이 의미를 확장할 수는 있어도 우주에 없는 존재를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식체계 안에 들어온 관계적 의미의 인간, 공간, 시간이 소중한 것이지 인, 시, 공과 같이 그냥 존재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이치와 닮아 있다.
우리가 지금껏 만들었고 앞으로 만들어낼 모든 것들은 마치 우리 뇌의 뉴런과 시냅스 연결의 지평을 확장하듯이 관계의 확장을 의미한다.
너무 커서 혹은 너무 작아서 연결시키지 못했던 관계의 지평을 문명의 도구를 통해 넓혀가는 길의 도정에서 우리는 안 보이던 관계를 확인하고 만나면서 때로는 두려움에 때로는 설렘에 궁극적으로는 반가움이라는 불연속 경계면을 미끄러져 나아갈 것이며 그 길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노자의 도가도 비상도 아닐까?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