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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쏜 화살이 떨어지는 곳

by 윤해



2024.01.06

시간은 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안에 놓인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고 사물에게도 공평하고 무자비한 공공재이다.

존재를 너머 관계를 맺고 관계 가운데 의식을 교환하는 영적 생명체에게 의식의 흐름은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내 맡겨진 육적 존재로서의 생명체와는 구별되며 또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던져진 한 생명체가 어떻게 자기의 존재를 인식하고 존재와 존재 사이의 소통을 도모하기 위해 말과 글이라는 도구를 개발하고 그 도구를 가지고 관계를 형성하여 관계 속에서 의식이라는 영적 물적 연결을 완성해 나가면서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에 자기의 존재를 수동적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의식이라는 능동적 자아를 확립하고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우주 안의 지구라는 행성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시간의 무자비한 폭력을 극복한 위대한 대서사가 바로 우리 인류의 역사임을 알아야 공감이 가능하다.

아일랜드의 천재적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1922년 발표한 율리시스라는 문학작품에서 우리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생소함을 알았다. 프로이드의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이라는 의식의 흐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문학사적 의미를 넘어서 그동안 수동적 시간의 무자비함에 몸을 맡기고 순응했던 인류의 의식세계가 능동적으로 시간의 경계면을 거슬러 올라간 유의미한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나름 추측해 본다.

그로부터 백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쏜 화살, 머리는 작고 발이 없이 끝없이 날아가는 소두무족처럼 생긴 시간은 종말이라는 과녁을 향해 쉬지 않고 날아가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면 금세 밤이 되고 한주를 시작하면 금방 주말이 되며 한 달을 시작하면 어느덧 달은 기울고 한 해를 출발하면 눈 깜짝할 새라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가 우리를 덮친다.

어쩌면 의식의 흐름은 시간의 무자비함에 염증을 일으킨 인간이 시간에 대한 환상을 깨부수는 일련의 반응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간마저도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잘못된 가정에 기초한 허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주는 끝없이 돌고 도는 무한 반복이라는 섭리만 존재하는 거대한 감옥일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감옥의 죄수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용의가 생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들어 낸 갖가지 의식이 의식을 낳고 그 의식이 고정관념을 만들어 우리는 문명이라는 약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벨탑을 세웠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원으로 돌고 돌며 반복되는 일상을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소두무족의 쏜 화살로 치환해 놓고 스케줄 대로 엄격하게 빈칸을 채우는 강박관념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하다가 이제는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시간이라는 무자비한 공공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며 의식의 흐름에 따라 방황하는 영혼을 만들어 내면서 이제는 급기야 의식의 흐름마저도 마음대로 제어하고 통제하며 환상을 극대화하는 무대를 꾸미며 그동안 만들어왔던 문명의 실체마저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가상현실로 채워진 AI시대를 향해 거리낌 없이 달려가는 모습이 우리가 직면한 지구의 스몰보이 인간은 아닐까 상상 한 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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