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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들고, 시집간다

by 윤해



2024.01.18

조선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문치가 강한 나라였다. 무인들이 득세한 고려에서 유연한 외교를 바탕으로 국익을 도모한 것과 달리 조선의 문치는 인간의 정신문명 고양이라는 관점에서는 탁월했으나 경직된 원칙으로 인해 조선이 지속된 500여 년 내내 내치와 외교 모두에서 매끄럽지 못한 파열음을 내면서 결국 망국의 길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갔다.

조선의 역사는 크게 보면 임진왜란 이전 명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질서가 사대하고 조공하는 외교질서가 구축된 200년 동안의 평화로운 시기와 임진왜란 이후 격변하는 중화질서 속에서 각자도생의 전란기로 나뉜다. 대를 이어 나가는 혼인의 풍습도 조선전기만 해도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가는 것이 일반적 모습이었다면 ,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 여자가 남자집에 시집가는 형태가 보편화된 모습으로 굳어간다.

조선전기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가는 처가입향의 대표적인 사례가 경주 양동마을 집성촌의 형성이다. 풍덕 류 씨 남자가 여강 이 씨 처가에 장가들고 , 시간이 흘러 월성 손 씨 남자가 풍덕 류 씨 처가에 장가들고 , 뒤이어 또 다른 여강 이 씨 남자가 월성 손 씨 처가에 장가들면서 정착해 간 사례가 경주 양동 마을이라고 한다. 이처럼 혼맥을 통해 도와 덕이 DNA 이중나선 구조와 같이 꼬이고 얽혀 회재 이언적과 같은 출중한 인물이 났으리라 짐작되며, 어머니가 수태가 시작되자마자 시작되는 편안한 태교에서부터 덕으로 보살피는 외가로부터 받는 유년기의 따뜻한 훈육방식은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된다. 이언적뿐만 아니라 이율곡도 어머니 신사임당과 같이한 강릉 오죽헌에서 보냈던 유년기가 불세출의 천재 이이를 배출한 토양인 것을 보면 장가를 가는 처가입향의 장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례이다.

조선후기 혼인의 모습이 시가에 시집가는 형태로 굳어지고 나서 매서운 시가식구들의 시집살이에 놓인 어머니의 신세가 놀란 새가슴이 되어 하루에도 수십 번 어머니가 어머나, 어머나 하면서 놀란 가슴 쓸어내릴 때 수태된 태아가 받을 스트레스는 오죽했겠나 태어나고 나서도 덕으로 키우는 외가와 달리 대를 이어 입신양명시키겠다는 욕심이 앞서는 차가운 친가의 양육방식으로 인해 유년기 교육은 친가의 선한 의도와 달리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라성 같은 성리학자를 배출한 조선 전기와 달리 조선후기는 뭔가 적적하고 심심하다.
이것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차이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장가드는 것, 시집가는 것 , 친가와 처가에서의 양육통 이 모든 것이 비혼이라는 시대사적 조류에 의해 흘러가고 있는 이시대에 그래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조상님들의 지혜를 온고이지신 해 보는 것도 시의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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