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세상을 살다 보면 갖가지 상황과 경우를 마주한다. 잔잔한 호수 같이 평화롭고 여유 있는 순간도 있고 성난 파도가 치고 폭풍우가 부는 바다 가운데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과도 직면한다.
모두는 제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고 한다. 링 위에 올라 상대로부터 묵직한 펀치를 한방 맞기 전에는 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려움을 당하면 공부가 된 사람이든 일자무식 이든 링 위에 올라 명치끝에 센 펀치 맞고 정신이 혼미해지면 오로지 살겠다는 일념으로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패착을 두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영장류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확연히 구분된다.
커진 뇌용량, 비좁은 산모의 산도는 상대적으로 작은 머리 넉넉한 산도를 가진 인간의 사촌 영장류와는 구별되는 출산 시스템을 가져야 했고 이러한 비좁은 산도를 두 번 비틀어 회전하면서 세상과 마주해야 했던 머리 큰 인간 태아의 출산은 단독 출산이 아닌 누군가가 산모를 도와야 출산이 가능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었으며, 이 사회적 시스템이 인간을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밀어 올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서로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단독출산이 가능한 영장류와 달리 세상에 나오기도 힘든 핸디캡을 오히려 서로 돕고 돕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승화시킨 지혜로운 자 호모사피엔스로 나아갔던 것 아닐까?
짧은 호흡의 역사를 봐도 정반합의 원리가 보이는 데 하물며 긴 호흡의 진화생태학에서 흐르는 정반합의 도도한 강물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회시스템의 결과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우리가 사회라는 시스템의 당사자로서 적극 참여하던 인생 전반전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던 불의가 오히려 피가 식고 열정이 식은 환갑 넘어서 잘 보이는 까닭도 인간 산모가 단독 출산을 못하고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하듯이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돕는 사회시스템으로 여기까지 진화했기 때문이다.
서로 돕는 진화의 정상시스템이 나 하나 잘 살면 그만이라는 반대 시스템과 충돌하고 있다.
심지어 이 반대 시스템은 인간의 밑바닥 정서인 측은지심을 이용하여 그동안 정상시스템의 핵심원리인 상부상조 마저 차용하여 지속가능한 정상시스템을 살짝 비틀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낙타 머리부터 문지방 디밀기 같은 야금야금 전략을 구사하므로 그 위장과 허울을 벗겨 내기가 쉽지 않다.
천지창조가 연상되듯 장대히 퍼붓는 장마비 같이 나날이 격화되는 사회 갈등과 소통의 부재가 단순히 시대적 문제가 아닌 진화생태학의 정반합의 원리가 정에서 반으로 뒤집어지는 도도한 강물 위에 사공도 없는 나룻배 위에 우리가 올라타고 있지는 않은지 장대비 사이로 밝은 태양을 기대하면서 번뇌의 증거인 머리 깎겠다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머리 깎아주고 나도 내 머리 깎아야 한다고 내미는 상부상조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