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정(好靜)으로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욕(無欲)

by 윤해



2024.02.16

나훈아의 히트곡 무시로라는 노래가 있다. 그냥 노래 제목만 들으면 외래어 같기도 한 무시로라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은 아니다.

무시(無時)로는 시시 때때로 아무 때나 정함이 없이라고 하는 우리 한자어이다. 이렇게 無라는 한자는 뜻이 오묘하다. 의미 그대로 없다고 해석해 보면 간단히 의미를 정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한 번만 돌려 생각해 보면 없다는 것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는 이야기 인지 도무지 알쏭달쏭하다.

자연을 원본으로 삼아 문명이라는 사본의 아픈 대목을 역설과 반전으로 극강의 인문학을 써 내려간 노자의 무위자연이라는 사유체계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무(無)의 개념은 늘 새롭고 반전을 거듭하는 아이러니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노자는 “나라는 올바름으로 다스리고, 군대는 기묘함으로 운용하나, 천하만은 오직 ‘무사(無事)’로서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세상 속의 조직에서 날마다 반복되는 기휘(忌諱, 규제)와 이기(利器), 피교(佊巧, 교묘한 기술), 법령(法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천하를 얻기 위한 무사(無事)의 행위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으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한다.

나(我)는 무위(無爲)로 화합을, 나(我)는 호정(好靜)으로 올바름을, 나(我)는 무사(無事)로 부자가 되었고, 나(我)는 무욕(無欲)으로 순박함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일단 노자의 말은 좀 혼란스럽다. 용어의 정의가 필요할 듯 보인다.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말은 이의가 없다. 그리고 급박한 위기인 전시에 동원되는 군대도 기묘한 전술로 운용해야 함도 당연하다. 그러나 천하만은 무사(無事)로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드디어 노자의 반전과 역설이 무(無)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했다. 무사(無事)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노자는 첫 문장에서 천하를 이야기했고 두 번째 단락에서 실증적 증거로서 천하 아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절화되고 전문화된 조직의 폐해를 적시했고 마지막 결론에서 그 모든 처방의 핵심을 나라고 하는 개인 개인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정의 원형질을 회복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600년 전 노자가 바라봤던 세상이나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고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천하 아래 세상이 무사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현실의 세상은 기휘(忌諱, 규제)와 이기(利器), 피교(佊巧, 교묘한 기술), 법령(法令)의 폐해가 가득한 소위 전문가 집단, 다른 말로 꾼들이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끊임없이 국민들을 호도하고 기망하면서 기휘와 이기, 피교 그리고 법령이라는 떡고물들을 떡시루처럼 한층 한층 포개면서 알게 모르게 떡고물처럼 우리를 갈아 내는 세상에서 사본에 불과한 세상을 무위자연의 원본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사(無事)로서 천하를 얻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무사태평이다. 꾼들이 판치는 세상의 잣대로 보면 무사태평은 무사안일로 간주되어 호된 비판을 받으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의 눈으로 보면 무사란 말의 의미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꾼들이 판치고 왜곡시켜 놓은 세상의 이익집단과 추한 욕망으로 왜곡되고 더럽혀진 조직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본인 자연으로 돌아가 무위(無爲)로 화합하고 호정(好靜)으로 올바르게 하며 무사(無事)로 부를 일구고 무욕(無欲)으로 순박함을 회복하라는 뼈아픈 지적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노자는 가르쳐 주고 있다.

비록 2600년 전 노자의 가르침이 암호나 비밀번호같이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세상의 번거로운 소음을 호정(好靜)으로 잠재우면 무시(無時)로 무위자연이라는 원본의 섭리가 우리를 무사(無事)하게 하여 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살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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