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5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라는 노자의 말씀처럼 부지(不知)의 지(知)는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늘 따라붙고 동행하는 친구요 동반자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부지의 지는 깨달음과 진리 앞에서 구도의 길 끝까지 가 본 인간의 한계를 경험한 이의 진솔한 고백이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는 무엇을 안다 모른다는 말을 할 때 기준이라는 것을 번번이 놓친다. 우리가 무언가를 인지하고 안다는 것은 우리의 인지범위 안의 아주 좁은 대역대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열어서 포착된 신호를 가지고 구성하고 해석한 일종의 신기루와 같은 환상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러한 명제는 조금이라도 깨달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인간과 사람의 근원을 추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직면하는 의문이요 장애물이다.
자연에서 본능대로 나고 자랐던 우리가 말과 글을 매개로 하는 문명을 이루면서 본능을 대체한 이성이란 존재는 감정과 감각으로 느끼는 본능을 인간 심연의 동굴 속으로 깊이 처박아 놓고 그 동굴문을 큰 바위로 막았다.
막았다고 없어진 것이 아닌 본능의 그림자가 도와 덕이라는 말과 글을 앞세운 문명 속의 이성의 질서 속에서도 어른거리며 살고 있는 모습이 문명화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본능과 이성의 관계는 한 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 인체가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살아가듯이 해가 뜨면 세상이라고 하는 생존경쟁의 장에 나서기 위해 이성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분투노력하다가 해가 지고 밤이 오면 이성의 갑옷을 벗고 본능의 감성이 이끄는 데로 잠자리에 들면서 심신을 회복하면서 또 다른 내일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닫고 무엇을 열 것인가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혹자는 본능을 앞세우기도 하고 혹자는 이성이라는 갑옷 속에 둘러싸여 도무지 벗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본능과 이성이라는 것은 자연에서 나와 문명을 건설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과도 같은 절대반지인지도 모른다. 무엇을 가지고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 이성은 오래된 친구 본능의 속삭임에 귀 기울어야 될 것 같다.
염화시중 불립문자와 같이 진리는 늘 본능 속에 숨어있는 진주요 보석이다. 도와 덕을 앞세운 이성이라는 도구를 앞세워 세상의 질서를 재단하다 보면 노자의 말씀처럼 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가당착적이고 모순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본능으로 느끼며 어리둥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