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4
사찰을 우리들은 절이라 부른다. 알 수도 없는 독경을 암송하느니 부처님을 향해 절에서 절을 하는 행위를 통해 땀이 비 오듯 오는 삼천배에 도전하는 것이 성불로 이끈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렀나 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열반하시기 전 내가 입적하면 반드시 나를 팔아 사찰을 짓고 나를 팔아 불상을 만들어 혹세무민 하는 자가 출현할 것이라 예견하시고 그런 자에게는 단 한 줌의 쌀도 주지 말고 그런 자가 아프면 한 첩의 약도 주지 말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법화경과 황제내경에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불교와 부처님이 보여주고 남겨준 불성은 괴리감의 차이가 아득하며 그것은 비단 불교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에서 빠지지 않고 나타나고 목격되는 현상이다.
끝없이 낮은 데로 임하고 하기하고자 하는 종교의 본질이 세상과 만나면 왕을 꼭짓점으로 하는 피라미드 조직과 결부되어 진리를 전하는 자와 신을 대리한다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권력과 부귀와 재물을 착취하였는가가 그대로 종교의 역사요 세상과 야합된 신정일치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며 국가였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종교는 극강의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이다. 불교만 해도 육체라는 껍데기를 벗고 해탈하기 위해 기울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겪은 고행은 실로 범부가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난 부처님의 열반송에는 이러한 고뇌와 염려 그리고 깨닫고자 하는 사부대중을 향한 현실적 타협책으로 가득 차 있다. 비단 부처님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경지를 돌파한 수많은 성자의 고민은 깨달음은 어쩌면 아침에 일어나 손을 들어 물로 세수하는 것처럼 쉬우나 깨달음을 전하고 설파하는 일이야 말로 어렵고도 지난한 일이라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왜곡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말과 글로써 같은 말을 수없이 말하고 쓰고를 반복한 실체가 법문이요 말씀이요 경전이요 바이블인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평평한 고속도로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자갈길이요 미로와 같은 오솔길이며 길 끝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는 중에 알아나가는 즐거움이 있으며 이 행복에는 지난한 대가가 있음을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사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진리의 에센스와 정수를 하루빨리 알고 싶고 깨닫고 싶은 뇌정보 환경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과정에서 실상(實象)의 진리보다는 대리자가 전하는 버금의 세상, 아상(亞象)을 만나게 되고 아상(亞象) 속에서 방황하다 보면 실상(實象)은 어디로 가고 아상(亞象)만 부여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상의 종교는 공고해진 아상(亞象)의 결과물이다. 이 결과물이 건축과 결부하여 화려하고 아름다운 사찰이나 교회나 성당 또는 모스크를 만들었지만 이것은 앞서간 수많은 성자가 그토록 염려했던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껍데기일 뿐이다.
현대의 종교생활은 어찌 보면 영혼을 정화하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이 말과 글이라고 하는 문명의 도구와 만나 아름다운 명산에서 멋지게 지어 올린 대찰 또는 화려한 도시에서 웅장하게 압도하는 교회나 성당, 모스크 안에서 웰빙 하고자 하는 심리의 발현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대리자를 통한 껍데기 성자가 판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 진리를 향해 구도하면서 알맹이 성자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길은 좁고도 험하기 그지없으나 이 역시 그 길의 끝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는 와중에 맛보고 느끼는 알맹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만 알아도 얼치기 성불은 한 것 아닌가 생각하며 절로 절을 하기 위해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