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3
나라의 국운이 경각에 달해 백척간두 누란의 위기에서 한 줄기 빛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의 산하를 구해낸 명장을 대하는 혼군의 옹졸함이 때로는 문명의 헤게모니를 바꾼다.
혼군과 명군, 간신과 충신, 간웅과 영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무엇이 이들을 조종하여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기기도 하고 자자손손 치욕스러운 오명을 남기기도 하는 것인가?
우리나라를 역사라는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 조선까지 모두 5백 년이 넘는 왕조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과격한 외교, 즉 전쟁뿐만 아니라 평화시에도 외교술이 매우 뛰어난 나라이자 민족임을 방증한다.
전쟁과 평화는 모두 외교의 결과다. 외교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실력 대 실력의 대결장이다. 반상의 대국도 몇 수 앞 정도는 내다볼 수 있어야 판세를 가져올 수 있듯이 국가 대 국가의 외교는 치열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스파이와 이중간첩 반간계를 통한 이이제이의 외교술은 고금을 통해 다반사로 일어나며 이러한 정보전과 물밑을 흐르는 압박의 결과가 국가 간의 합종과 연횡이라는 외교적 줄 세우기로 발전할 때 세상은 요동치며 국가끼리 균형점을 찾거나 전쟁이라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역사는 웅변한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동아시아 대전을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망상가가 벌인 불꽃놀이로 치부하기는 1592년이라는 시대사적 의미가 심장하다. 1492년 칼럼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100년이 지난 시기 그리고 일본 전체가 100년간의 내전을 종식한 시기 그리고 그 내전종식의 결정적 역할을 한 오나 노부나가의 조총부대라는 신무기의 출현, 그 신무기가 수입된 곳은 1550년 나가사키현의 서쪽 끝 섬인 히라도에 입항한 최초의 서양 배 포르투갈 배였다.
히라도의 영주 마쓰우라 다카노부는 무역이 큰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선교사를 앞세운 포르투갈에 천주교 선교를 허락하고 서양과의 무역을 시작하였고 이 무역의 결과 포르투갈의 조총이 수입되었으며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듯 조총은 조총부대를 만들었고 조총부대가 철포부대로 개량되어 100년간의 일본내전이 종식되었다.
일본 통일 후 기리시탄(그리스트 교)을 앞세운 서세동점의 시작점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 즉 동아시아 대전이며 왜군은 문명화된 대륙국가를 향한 해양국가들의 아바타로서 참전한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의심해 보는 것도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대륙과 해양 간의 문명의 충돌은 결국에는 땅을 선점한 대륙에 의해 압도될 수밖에 없으나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착취하여 힘을 키운 해양세력의 힘은 예전의 해적 수준이 아니라 드디어 전통의 강자 대륙문명에 도전장을 내기까지 이르렀다.
1592년 임진년 당시 100년간의 시간을 은인자중 하던 서세는 동점을 위한 거대한 첫발을 왜군이라는 아바타를 앞세워 현해탄을 건너 유라시아 대륙의 첫 관문 부산에 수십만 대군을 상륙시켰고 어쩌면 칼럼부스의 신대륙 발견과 상륙을 뛰어넘는 문명사적 대사건이 임진왜란인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임진왜란이라는 시각에서 전쟁을 바라보면 임진년의 전쟁은 서세동점의 현대 국제질서의 단초가 되는 사건이며 서세에 의한 동점을 최초로 막은 사건이며 공고했던 대륙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중원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고 전장이 되었던 한반도는 조선이 거덜 날 정도로 거의 회복하기 어려운 내상을 입고 몰락의 길로 빠져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세의 동점을 막은 위대한 명장이 이순신 장군이다. 선조라는 혼군이 명장을 알아보지 못하고 핍박하는 것도 모자라 고문을 통해 죽이려 했고 그래도 정탁과 같은 올곧은 대신의 목숨을 건 탄원,
단 한 사람, "적이 무서워하는 사람은 살려야 한다"는 72세의 노 대신은 죽을 각오로 혼군 선조에게 올린 1298자 상소,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로 겨우 명장은 백의종군하고 살아남아 누란의 위기에서 오직 13척의 배로 동점을 위해 달려드는 서세를 기어이 노량에서 격퇴하고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바쳤다.
명장에게 승리하고 살아남는 것은 기리시탄(그리스트교)의 율법 그대로 죽지 못하는 원죄임을 증명하듯 서세의 아바타 왜군이 동점을 풀고 물러가는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명예로운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혼군이 몰고 간 명장의 죽음이 오늘날 지금 여기서 반복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세태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