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2
광릉 수목원의 단풍나무도 무리 지어 있으니 풍요롭다. 개별 생명이 독자적 활로를 포기하고 무리 지어 서로 협력하고 산다는 것은 개별개체의 유불리를 넘어서는 생존을 위한 탁월한 선택임을 지구의 먹이사슬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성으로 똘똘 뭉친 개별생명이 무리 지어 사는 까닭의 대부분은 생존확률을 높이는 것이며 생존의 대부분은 먹고사는 문제일 것이다.
나나 나라나 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쓰는 인사말의 대표가 아침 먹었나, 점심 묵었나 저녁 드셨나 이다. 어떻게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며 저녁을 드실 수 있겠냐 만은 이런 말을 그야말로 다반사로 쓰고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기아선상을 헤맨다는 말은 무리를 만들어 공동체를 키우며 국가를 수립하고 그 국가가 지구촌이 된 지금으로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심히 훼손하는 현상이다.
기아 앞에 따라붙는 전쟁은 늘 인류에게 헐벗고 배고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우리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 전후 배고픔에 몸서리치던 시절이 엄연히 존재했고 오로지 배고픔을 극복해야겠다는 강렬한 욕망과 오천 년 가난을 이겨내야겠다는 지도자와 국민의 염원이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을 낳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일도 불사하는 영웅들의 피와 땀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먹고살기 위해 모인 무리나 공동체나 나라나 일단 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면 태도가 돌변하여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신기할 정도로 무리에서 있었던 무리한 사건들을 쏟아내며 그간 먹고살기 위해서 무리에게 저당 잡히고 행사 못한 개인의 유리를 봇물같이 쏟아내곤 한다.
그리고 재빨리 또 다른 어젠다로 옮아 탄 새로운 무리는 개인의 유리를 저당 잡아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무리로 새롭게 탄생되는 것이다. 즉 먹고사는 무리가 목적달성이 되고 난 다음 뒤이어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무리가 추상적이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아름다운 네이밍을 하면서 대중에게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무리는 무리일 뿐이다. 그 모든 무리는 목적달성을 위해 개인의 유리를 하나하나 저당 잡고 모아서 구성될 뿐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과감히 해체하고 개인에게 저당 잡은 유리를 개인에게 돌려주어야 함에도 여전히 목적달성이 되지 않았다고 우기며 개인의 유리들을 부여잡고 그 개인의 유리를 자신의 전유물로 착복하는 선사 후공의 무리가 속출하고 있는 곳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정이 가득한 세상이 되리라 생각하고 달려왔건만 무리를 지어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무리 때문에 개인의 유리를 무리의 모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민주화의 딜레마에 우리는 서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타협하는 평화적 해결뒤에는 정이 넘치는 공존의 공동체로 발돋움하겠지만 진영을 구분하고 갈라치고 뒤집어 씌우며 악다구니 치는 전쟁뒤에는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기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역사의 정반합을 배울 때 우리는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광릉 수목원의 단풍나무도 무리 지어 있으니 풍요롭다. 개별 생명이 독자적 활로를 포기하고 무리 지어 서로 협력하고 산다는 것은 개별개체의 유불리를 넘어서는 생존을 위한 탁월한 선택임을 지구의 먹이사슬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개성으로 똘똘 뭉친 개별생명이 무리 지어 사는 까닭의 대부분은 생존확률을 높이는 것이며 생존의 대부분은 먹고사는 문제일 것이다.
나나 나라나 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쓰는 인사말의 대표가 아침 먹었나, 점심 묵었나 저녁 드셨나 이다. 어떻게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며 저녁을 드실 수 있겠냐 만은 이런 말을 그야말로 다반사로 쓰고 살았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기아선상을 헤맨다는 말은 무리를 만들어 공동체를 키우며 국가를 수립하고 그 국가가 지구촌이 된 지금으로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심히 훼손하는 현상이다.
기아 앞에 따라붙는 전쟁은 늘 인류에게 헐벗고 배고픔을 동시에 가져온다. 우리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 전후 배고픔에 몸서리치던 시절이 엄연히 존재했고 오로지 배고픔을 극복해야겠다는 강렬한 욕망과 오천 년 가난을 이겨내야겠다는 지도자와 국민의 염원이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을 낳았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그 어떤 일도 불사하는 영웅들의 피와 땀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먹고살기 위해 모인 무리나 공동체나 나라나 일단 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면 태도가 돌변하여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신기할 정도로 무리에서 있었던 무리한 사건들을 쏟아내며 그간 먹고살기 위해서 무리에게 저당 잡히고 행사 못한 개인의 유리를 봇물같이 쏟아내곤 한다.
그리고 재빨리 또 다른 어젠다로 옮아 탄 새로운 무리는 개인의 유리를 저당 잡아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무리로 새롭게 탄생되는 것이다. 즉 먹고사는 무리가 목적달성이 되고 난 다음 뒤이어 민주화라고 하는 새로운 무리가 추상적이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아름다운 네이밍을 하면서 대중에게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무리는 무리일 뿐이다. 그 모든 무리는 목적달성을 위해 개인의 유리를 하나하나 저당 잡고 모아서 구성될 뿐이다. 목적이 달성되면 과감히 해체하고 개인에게 저당 잡은 유리를 개인에게 돌려주어야 함에도 여전히 목적달성이 되지 않았다고 우기며 개인의 유리들을 부여잡고 그 개인의 유리를 자신의 전유물로 착복하는 선사 후공의 무리가 속출하고 있는 곳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정이 가득한 세상이 되리라 생각하고 달려왔건만 무리를 지어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무리 때문에 개인의 유리를 무리의 모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민주화의 딜레마에 우리는 서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타협하는 평화적 해결뒤에는 정이 넘치는 공존의 공동체로 발돋움하겠지만 진영을 구분하고 갈라치고 뒤집어 씌우며 악다구니 치는 전쟁뒤에는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기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역사의 정반합을 배울 때 우리는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