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3
음과 양이 교차하면서 중에 들고 그중에서 또다시 음과 양이 분화되고 중으로 합치는 만물의 섭리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그 어떤 대상도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자 숙명이다.
보자기로 한(恨)을 싸서 이야기보따리로 한(恨)을 풀어내는 한국인 만의 한(恨)풀이 정서는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궁금해진다.
우리의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오천 년 가난과 한(恨)의 민족이 그동안 보자기로 꽁꽁 싼 한(恨)과 가난을 보따리 풀듯이 콸콸 쏟아내고 폭발시켜 근대화의 기적을 이룬 대사건이 우리가 달려왔던 지난 70년간의 성취다.
말과 글이 문명의 운명이라면 음악과 미술은 문명의 숙명이다. 아침에 운명에 이끌려 말과 글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뛰어다니며 온갖 에피소드를 겪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면서 생생하게 느끼는 생각을 통해 해가 떠있는 낮을 살았다면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생각과 생각이 부딪혀 푹 삶긴 삶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상처받아 만신창이가 된 나의 심신과 정서를 위로해 주고 녹여줄 트롯과 같은 음악, 조각보와 같은 형형색색의 작품으로 낮 동안 우리가 감내했던 상처와 한(恨)을 감싸서 안아줄 보자기가 있어야 비로소 꿀잠을 잘 수 있는 숙명을 받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 아베 마리아를 불러야 어울릴 것 같은 트롯가왕 미국인 마리아의 '천년바위'를 듣노라면 보자기로 싼 한(恨)을 풀어내는 음악에는 국경이 없음을 실감한다.
말 만한 미국인 처자 마리아가 꺾어지듯 부르는 생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소절에 이르면 왠지 빨리 알려주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도 들지만 뒤이어 나오는 부질없는 욕심 버리고 천년바위 되리라는 난득호도(難得糊塗)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그저 감동의 물결이 몰려온다.
마리아가 부른 천년바위가 한(恨)을 트롯 보따리로 풀어낸 거라면 맵디 매운 시집살이의 한(恨)을 형형색색 미술로 승화한 예술작품이 조각 보자기이다.
째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와 애를 낳고 살림을 일으키며 고단한 삶을 삶을대로 삶고난 후 할머니가 되어 옷을 짓고 남은 조각 옷감으로 이리저리 기워 합을 맞추고 형형색색 색깔까지 맞춘 이 땅의 고단한 삶을 산 할머니들의 애환과 한(恨)을 담은 조각 보자기야말로 난득호도(難得糊塗)의 본보기이며 칸딘스키의 추상화와 피카소의 입체화가 절묘하게 콜라보되고 거기에 더해 할머니의 평생의 애환을 삶아 삶이 담긴 한(恨)을 보자기로 싼 걸작임에도 평범한 상다리 소반 위에 행여나 때를 놓친 손자가 먹을 소박한 상차림 음식 위에 가볍게 올려놓는 조각보자기가 상보자기가 되는 실용성까지 더하니 어디 예술을 위한 예술품과 비교하기가 멋쩍어진다.
보자기로 싸고 보따리로 푸는 것이 삶의 섭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질없는 욕망으로 싸기만 하고 풀지를 않고 , 풀기만 하고 싸지만 않는 것이 한(恨)으로 뭉쳐 무거워서 훨훨 날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백 년도 안 되는 인생을 보고 천년을 한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천년바위가 안타깝게 우리를 바라보면서 트롯가왕 마리아의 기막히게 꺾는 노래 가락에 한 순간 귀가 번쩍 전율처럼 흐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것은 우리 모두 한(恨)을 조각 보자기에 싸서 푼 난득호도(難得糊塗), 어리숙한 게 가장 어렵다는 삶을 살아간 할머니의 후손이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