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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목마

by 윤해


2024.04.13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라틴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Aeneid of Virgil)에 수록된 트로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트로이 목마"는 난공불락의 요새나 성안으로 스스로 적을 끌어들이게 유도하는 모든 속임수나 책략을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컴퓨터 사용자들 스스로 속아서 자신의 컴퓨터에 무망결에 설치되어 실행되는 악성 컴퓨터 프로그램을 트로이 목마라고도 한다.


오디세우스가 정예병사를 목마 속에 숨기고 트로이 목마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 있을 때 트로이 군사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축하연을 통해 축배를 들고 술에 곯아 떨어진 틈을 타서 굳게 닫힌 트로이 성의 성문을 밖에서 안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열어 트로이를 멸망시킨 사건이야말로 어찌 보면 서양의 세계사, 즉 팍스 로마나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위기와 패배의 아픔을 딛고 위기를 기회로 멸망을 전화위복 하여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토대의 지층 하나하나 마다 멸망의 교훈을 갈아 넣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더 단단해지고 강해져서 팍스 로마나라고 하는 부흥의 시대를 활짝 연 것이다.


우주적 존재인 우리가 말과 글을 가지고 만든 문명이라는 사이버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우주라는 자연과 세상이라는 문명의 불협화음은 거의 숙명적으로 빈번하게 발생한다.


더구나 말과 글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늘 말 다르고 글 다르고 나아가 이 달라지는 말과 글로 인해 행동마저도 갈피를 못 잡고 갈 지자 행보를 보이기 일쑤이고 이 행동을 또다시 말과 글로 덮으려다 보니 온갖 협잡과 억지 궤변이 난무하고 그로 인해 문명의 밝음은 어둠으로 변하고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돌아가 힘의 논리라고 하는 원초적 세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고 하는 생태학 제1 법칙에 따라 호 불호 개악과 개선 개혁과 퇴행이라는 인간적 판단과는 별개로 자연은 무자비하게 변하고 또 변할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파도를 잘 올라타느냐 아니면 그 파도에 맞아 도태되느냐의 선택 정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가 아닐까?


자연의 섭리는 할 수 있는 손하나에 귀 세 개가 달려 있는 섭리(攝理)의 세계이다. 늘 잘 듣고 적어도 천지인 세 가지 소리를 조화롭게 조율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서면 손을 움직여 실행할 수 있는 것과 그저 세상이 만든 공간, 즉 비빌 언덕 하나 믿고 말과 글 하나 섞고 버무려 행동을 말로 덮는 것이 세상의 원리(原理)이다.


이러한 세상의 원리(原理)가 어떻게 자연의 섭리(攝理)를 따라갈 수 있을까?


우주적 존재로서 세상에 나온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세상의 원리(原理)와 우주의 섭리(攝理)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고 우리는 세상의 인간인 동시에 자연에서 나온 사람이기도 한 존재인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 같은 책략과 술책으로 잠시 잠깐 트로이성을 멸망시킬 수는 있어도 세상의 원리(原理)라는 것도 길게 보면 팍스 로마나라고 하는 세계사의 원리(原理)가 지배하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로마를 만드는 원리(原理)의 세상에서도 꿋꿋하게 자연의 섭리(攝理)가 엄연히 숨 쉬는 세상을 만들고 볼 수 있다는 희망만큼은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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