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가운데 중 마음 심, 이 중심이란 말은 무엇일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중심을 못 잡는 것이요 에너지가 모자란 인지적 구두쇠가 되어 방침을 정해놓고 상황이 아무리 바뀌어도 요지부동 생각과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도 중심을 잃은 모습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라는 생태학 법칙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우리는 동적인 변화를 매 순간 목격한다. 우리 몸은 물론 정신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마저도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달리고 있다. 시속 1600킬로미터로 돌고 있는 지구 자전 속도를 어느 순간 느낀다면 우리는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착각 속에서 살고 착각에 기반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인식하에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판단은 무조건 착각할 수 있다는 겸손한 결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겸허한 사실에 기반하면 확신에 찬 웅변, 선동, 글, 이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중을 선동하고 기망하며 공포를 빙자하여 우리들의 영혼을 털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중심의 부재에는 가치관의 아노미 현상에 기인된 바가 크다. 침묵하는 다수의 공포를 악용하여 소수의 모진 인간들의 선정적 선동으로 온통 사회가 선과 악의 대결이라도 되는 듯 도도한 세계사의 흐름은 도외시한 체 위선의 선점에 총력을 다해 달려온 우리 사회, 이제 공동체의 기본적 가치관마저 개별집단의 악다구니에 파묻히고 기승전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위 아래 할 것 없이 최대이익추구자 만이 살길이라고 여기며 오늘도 내일도 자기 확신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괴물들을 양산하고 있다.
1일 3성, 적어도 하루에 3번은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착각 속에 사는 우리는 이렇게라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도무지 착각 속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 잘못된 선입관,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은 그 덧 쒸어진 색깔 때문에 무엇을 보던 파랗거나 빨갛다. 그래서 매 순간 내가 착각하고 색안경을 끼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서 살피는 반성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그런데 반성은커녕 누가 봐도 뻔한 잘못을 해놓고 입만 열면 성찰하겠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되돌아 착각하고 잘못한 자신을 살펴야 하는데 타인을 살펴보고 관찰만 하겠다는 것은 또 무슨 경우일까?
기본적으로 매스미디어는 공포를 파는 도구이다. 식자우환,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나 공포를 팔던 약을 팔던 황색 저널리점화된 현대의 언론에 예나 지금이나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기조에 부화뇌동할 필요도 없다. 그냥 우리는 사실을 보려고 노력하고 행간을 읽으려고 힘을 쏟아야지 싸움에 휘말리면 반성할 에너지는 금세 바닥나 버린다.
대화의 주도권은 화자(話者)가 아니라 청자(聽者)가 쥐고 있듯이 매스미디어라는 거대한 화자(話者)도 꼼꼼히 듣고 체크하고 반성해 보는 청자(聽者)인 우리들에게 걸리면 봄날에 눈녹 듯 사라지는 허깨비 같은 존재일 것이다. 허깨비는 제 스스로 싸울 줄은 모른다. 대개 싸움을 붙여놓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그 허깨비는 고상하고 달콤한 이상과 말로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모순된 세상에는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한 적도 실재한 적도 없다. 없는 것을 찾는 시대적 허망함에 가려 마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았던 가치관의 아노미현상이 지금도 망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잡고 중심을 잡으면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유쾌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