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9
월드 이즈 노 아스팔트, 고3 시절 야간자습 속칭 야자를 하고 있는데 웬 알지도 못하는 다른 반 학우 한 명이 들어오더니 빈 칠판에 대뜸 문장이 되는지 안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필휘지로 갈겨써고 중얼거리며 나가는 것이 아닌가?
" 세상 고르지 않네"라고 중얼거리면서 나가는 낯선 동급생의 뒤통수를 보면서 그때는 몰랐다.
자기 딴에는 고3 때까지 배운 짧은 영어로 그렇게 의역한다고 했지만 그게 그것인지는 지금도 고개가 갸웃거린다.
어쩌면 실체적 진실은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몇 마디 말에 있는 것이다.
오늘 나는 세상 고르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면 대부분은 이제껏 인생을 살고도 세상이 고른 줄 알았단 말이냐?라고 반문할 것이다.
맞다. 세상은 아무리 봐도 고르지 않다. 아니 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자연도 고르지 않다.
여기서 의문이 들어야 마땅하다. 고른 것이 무엇이냐고?
고르다의 사전적 의미는 여럿이 다 높낮이, 크기, 양 따위의 차이가 없이 한결같다. 그리고 상태가 정상적으로 순조롭다는 것이며 가지런하다, 나란하다, 반반하다 와 비슷하게 쓰이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이나 심지어 자연마저 고르다는 것은 사람이나 인간들이 자연과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일 뿐 어쩌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22, 12, 21, 무슨 숫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나라 육군 사단 중에 근무하기가 가장 까다롭고 환경이 열악한 사단 순서다.
물론 가장 힘든 부대는 자기가 근무한 부대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군대를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의 매체에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분석했다고 하니 수긍이 가며 분명한 것은 아무도 그곳에 자발적으로는 가지 않는 기피 사단임은 분명하다.
소위 말하는 백도 배경도 없는 물정 어두운 이 땅의 자식들이 허무한 애국심 하나 부여잡고 배치되는 3군단 소속의 최전방 사단, 어쩌다 보니까 논산이 아닌 춘천 102 보충대로 입소했고 102 보충대에서 갈 수 있는 사단 중에 가장 열악한 최전방 강원도 사단에 배치되어 한 달 하고도 보름 가까운 시간을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죽도록 구르고 난 다음 최전방 전선에 배치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험준한 산악 GP나 GOP에 총 들고 서 있어 보면 왜 전두환 소장이 정승화 참모총장이 자기를 이곳으로 보내려는 인사발령 첩보가 사전 누출된 것이 도화선이 되어 국가의 운명을 바꾼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는지 일견 이해가 되기도 한다.
세상 고르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피부로 느끼는 곳이 군대이다.
첫 단추를 전략적으로 시작하지 않고 무모한 애국심 하나로 시작하는 입대장정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너무나 힘들어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열악하고 위험하고 춥고 배고프고 자기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동토와 폭설의 최전방 고지이다.
약삭빠른 자들이 이런저런 연줄로 이리저리 편한 부대 편한 보직으로 빠져나간 빈자리를 어둠의 자식들은 100(일빵빵) 소총수, 일명 땅개로 달랑 소총 하나 들고 얼어붙은 땅을 녹이며 국가의 최전방 고지를 잠도 못 자고 지켜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얼마 전 12사단 신병교육대에서 중대장으로부터 군기교육을 받던 신교대 입소 8일 차 장정중 한 명이 사망한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과연 그 장정은 어떻게 했으면 살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세상이 고르고 가지런하고 반반했으면 살아났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전날 내무반에서 떠들었다는 죄(?) 목 하나로 3시간이 넘도록 40kg이 넘는 군장에 돌덩어리 같은 책까지 집어넣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완전군장 구보에 이은 선착순 그리고 완전구장을 메고 푸시업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여군 중대장은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강도의 고문행위를 이제 입소 8일 차 장정에게
그렇게 강제로 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었다면 횡문근 융해증으로 죽어가는 입대 8일 차 훈련병을 꾀병으로 방치하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지방의 열악한 병원에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한 젊은이를 죽어가게 하지 않고 개나 소나 부르는 응급헬기를 타고 서울대 병원 응급실에서 거뜬히 그 젊은이를 살려냈을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전방 사단에 배속된 두 젊은이가 쌍팔년도 군대가 아닌 지금의 선진병영(?)에서 하나는 가해자로 하나는 피해자로 우리들 앞에 등장해 있다.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다만 세상이 고르지 않은 잘못일까? 아니면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반칙과 변칙을 밥먹듯이 하며 죽기 살기로 분투노력하여 세상을 고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당최 햇깔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