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7
무엇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믿는 것이다.
Seeing is believing , 이라는 시각문명의 핵심과 정곡을 찌르는 말처럼 우리는 보지 않고는 믿기 어려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각 문명도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엄청난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우리가 보는 것은 인간으로서 볼 수 있는 가시범위 안에서만 볼 수 있다는 한계를 번번이 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인간은 가시범위 안에 들어온 것 중에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점이다.
셋째, 우리 인간은 그렇게 어렵게 본 것을 가지고 또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 본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하여 우리의 시각중추에 맺힌 상마저도 우리 인간은 진화생물학적 이력과 기억을 총동원하고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겪은 후천뇌까지 가동한 다음 의미를 부여하고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믿음은 나름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그 가치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가 세상을 보는 잣대가 되어 호 불호를 판단하고 재단하면서 백 인 백 색의 자기만의 색깔을 형성하고 그 색깔에 따라 행복감과 불행감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사는 우리 인간은 농업혁명 이후에 잉여생산물이 화폐로 바뀐 이래 정치형태와 생산수단은 부침을 겪었지만 화폐경제의 중심에 서 있는 돈에 대한 욕망만큼은 개별인간의 가치관 과는 별개로 뿌리가 깊은 원초적 본능, 성욕 식욕 수면욕을 뛰어넘는 사회적 본능이라고 부를 만큼 우리의 행복감에 끼치는 영향력이 지대하다.
물욕으로 통칭되는 돈을 향한 본능은 견물생심으로 표현되듯이 없던 마음도 벌떡 일으켜 우리를 돈의 노예로 만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우리 인류가 농업혁명을 통해 잉여 생산물을 생산한 이래 썩지 않는 잉여재화에 대한 욕망으로 화폐를 발명하였고, 보관 가능하며 자손만대까지 물려줄 수 있는 화폐, 즉 돈은 20억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불로불사의 해당계 세포를 다시 만난 기쁨을 선사하였고 불로불사의 해당계 세포가 비록 생명의 질을 폭발시키기 위해 미토콘트리아와 결합하여 그때는 불로불사를 포기하였지만 이번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욕망이 돈에 투사되어 돈을 20억 년 전에 헤어진 해당계 생명체와 동일시하는 심정인가 하고 상상한다면 너무 나간 상상은 아닐까 궁금해진다.
돈은 돌고 돌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거의 유일한 잣대로 공인받고 있다. 일단 돈이 없으면 많이 불편해지고 비루해지며 무엇보다 이 불편함과 비루함을 이겨낼 정도의 멘털을 가진 현대인은 거의 없다는 것이 돈이 가진 힘이다. 그리고 함께 알아야 할 사실은 돈을 어느 정도 가지고 나면 더 이상 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환상에서도 일찌감치 빠져나와야 한다. 돈은 불행감을 막을 수는 있어도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재주는 없다. 자기 분수 이상의 돈을 소유하면 돈은 수십억 년 이상된 해당계 생명체가 환생한 것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즉시 주인이 되어 우리를 노예처럼 부릴 것이라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해두고 싶다. 돈은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是以聖人 爲腹不爲目 노자 제12장의 말씀처럼 성인은 배를 위함이지 눈을 위함이 아니다는 말처럼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견물생심으로 돈을 구했다면 행복감을 구하기 위해서는 뱃속이 따뜻하고 든든해야만 한다.
눈에 보이는 돈만을 쫓다 보면 복장이 터지고 배알이 곯려 마음 편할 날이 없고 노심초사하다가 건강도 잃고 돈도 도망가는 패가망신은 화폐경제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흔하디 흔한 평범한 범사임을 명심해야 행복까지는 모르나 불행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겠나 라는 생각이 든다.
'晝眠夕寐(주면석매), 藍筍象狀(남순상상)’, “낮에는 꾸벅 졸고 밤에는 잠을 자니, 상아 침대 위에 푸른 대나무 돗자리로다.” 천자문 제106구
주홍사 선생님의 가르침 대로 맘 편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구나 하고 "졸고 자는" 필살기 아니 필생기 하나 정도는 이 생에서 익힌다면 우리는 행복에 이미 한 발자국 다가선 것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