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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에게는 배우고 반려자는 반려하지 마라

by 윤해


2024.07.21

평생을 살아도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배우자다.

음양 중의 개념처럼 남과 여가 만나 유전자와 성격을 반분한 자식을 만났으나 그렇게 만난 자식을 두고도 잘난 점은 나를 닮았고 못난 점은 너를 빼다 박았다고 우기며 살기가 쉽다.

생명으로서 배우자의 사전적 의미는 성숙한 반수체(半數體) 생식 세포로서 다른 세포와 접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형성하는 세포로, 정자 또는 난자를 이른다.

우리가 배우자의 의미를 추상적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자는 난자가 배우자이고 난자는 정자가 배우자인 것이다.

우주의 섭리가 나누고 결합하고를 무수히 하는 것처럼 세상의 원리도 배우자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며 동시에 음양 중의 끝없는 반복 아닐까?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만난 배우자와 잘 지내려면 우리는 배우자와 사랑을 나누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볼록거울이면 배우자는 오목거울이듯이 볼록이 와 오목이가 서로의 부족한 점과 빈틈을 잘 메꾸어 주어야지 배우자와 잘 지낼 수 있다.

서로가 잘 났다고 싸우기 전에 서로가 다르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지 배우자의 실체를 올바르게 배우는 첩경이다.

다르게 태어난 사람끼리 만나 서로의 기를 이치에 맞게 끼리끼리(氣理氣理) 나눈다는 것은 세상의 원리는 고사하고 우주의 섭리를 푸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어쩌면 영원한 평행선을 달리는 배우자를 보고 우리는 무엇을 배우려고 하지 말고 배우자를 배워야 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모든 배움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 관심과 애정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일 때 비로소 얻는 것이라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다.

남자가 여자를 배우고 여자가 남자를 배울 때 우리는 배우자를 배우자는 말을 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대를 살면서 유니섹스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고 남자도 여자도 세상 속의 인간으로 재탄생하면서 가치척도의 기준이 자본주의적 가치인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하고 배우자를 배우다 보면 배우자의 선택 기준이 배움의 고통을 겪는 길보다 편안하게 배우자를 이용하려는 세태가 자본의 영역이 아닌 결혼의 영역까지 침투되어 우리를 좌절케 한다.

사랑이라는 배우자를 배우는 절대반지가 없이는 아무리 기도를 세 번하고 배우자를 바라봐도 도무지 배우자를 배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서로가 배우자를 배울 엄두를 내기 어려운 세상을 만나 결혼에 요행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거나 식거나 변하는 순간 배우자는 순식간에 배우자에서 반려자로 바뀌면서 이혼이라고 하는 반려자를 반려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이와 같이 배우자를 배우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 배우자는 그저 인생을 함께 사는 반려자가 되어 수 틀리면 서로가 서로를 반려하게 된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풍요의 역설로서 다가오는 결혼시장의 배우자 감이 서로가 서로를 소박하게 알아가고 보완해 가던 배움의 장에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고 줄을 세우고 느낌보다는 이성으로 끌림보다는 계산으로 선택한 배우자가 왜 광속으로 반려자가 되어 바뀌는 가를 이제 찬찬히 살펴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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