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3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만나면 깔깔 거리며 웃었고 헤어지면 아쉬웠으며 다시 만날 약속을 잡기 위해 보다 중요한 일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시험에 들기 전까지는 그것이 한낱 웰빙이었으며 우정을 가장한 교제였으며 의리를 구호삼은 여기가 저기보다 안락한 합목적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세상에는 자신의 것을 조금도 내어주지 않는 사람과 자신의 것을 다 내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관계 사이를 교유의 범위로 삼고 그 범위 안에서 너와 나가 치열하게 거래를 하고 있는, 밀당을 하고 있는 사이를 혹여 우정이나 의리로 오해하고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우정이나 의리의 에너지 언덕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높다.
붕우유신이라는 맹자의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친구라고 하는 것은 굳이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지불한 정서와 시간의 매몰비용만 포기하면 언제라도 헤어질 수 있는 관계이다. 특히 이 헤어짐의 스모킹 건이 바로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하는 외마디와 함께 따라오는 믿음의 상실이다. 즉 친구는 믿음이 사라지면 지인만도 못한 관계로 바로 회복된다. 회복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원래 그 사람은 친구를 가장한 지인이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의미를 찾는 존재인 우리가 관계를 갈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관계를 선용하지 못하고 이용하려들며 더 나아가 악용을 하게 되면 그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관계에서 가장 적당한 거리에 있는 관계가 친구 관계이다. 살을 부대끼고 사는 식구도 아니고 피를 나눈 혈연도 아니며 같은 공간에서 사는 이웃사촌도 아닌 불가근 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환경이 가장 적당하게 조성되어 있는 관계가 친구사이이다.
그래서 우리는 틈나는 대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보다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줘가면서까지 시간을 할애하고 정성을 쏟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근불가원의 분위기에 취해 한 세상을 살다 보면 뭣이 중한줄을 모르고 비몽사몽 한 생을 살기 바쁘고 지금은 그럴 일도 없지만 IMF와 같은 금융위기 때마다 친구를 가장한 지인의 절박한 호소에 넘어가 가장 중요한 가족의 보금자리 마저 부실경영을 한 금융기관의 사악한 몸통 속으로 전 재산을 날리면서 정말 중한 가족을 차디찬 길바닥으로 내모는 어이없는 가장들이 속출하는 것도 우정이라는 허울 좋은 분위기에 세뇌된 참담한 결과물 아닐까?
친구는 하나면 족하고, 둘은 많고, 셋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 헨리 애덤스(Henry Adams)의 말처럼 넘어가야 할 에너지 언덕이 태산처럼 높은 진정한 친구 한 명이 나 자신이 되기도 어렵고 내가 교유하는 네가 되기도 어려운 친구 관계라고 하는 두터운 언덕을 넘어야 하는 세상의 원리 앞에서 내가 그 한 명의 친구가 되고 네가 그 한 명의 친구로서 남는 일은 시험에 들지 않고는 아무도 모르는 세상의 시크릿 코드 같은 암호로 둘러싸여 있는 불가지 영역 아니겠는가 유추해 본다.
제발 불가근불가원의 우정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시험하는 시험에 들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친구는 하나면 족하고, 둘은 많고, 셋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