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화자(話者)의 수사학, 청자(聽者)의 심리학
2024.08.04
대화는 화자(話者)의 수사학이 아니라 청자(聽者)의 심리학이라고 한다. 결국 언뜻 보기에는 대화를 리드하고 있는 자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말하는 자에게 있는 듯 보이나 실제 대화의 키는 듣는 자가 어떻게 듣고 이해하느냐가 대화를 결정한다.
그리고 한번 화자(話者)가 영원한 화자(話者)가 아니듯 한번 청자(聽者)도 영원한 청자(聽者)가 아니다. 공을 주고받는 놀이 같이 공수를 주고받으며 역할도 교대하는 것이 대화의 본질이며 그중에서도 청자(聽者)의 경청이 전체 대화의 질을 좌우한다.
우리가 사는 현대는 엄밀히 말하면 대화가 실종된 시대이다. 전자통신의 발명으로 야기된 각종 매스미디어의 출현에 정보에 목말라 있던 대중의 열광 한편에 도사리고 있던 부작용이 대화의 단절이다.
전파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허공에다 쏘는 일방향 화자의 수사학이다. 이 수사학은 집단지성의 결과물이어서 어느 한 개인의 허술한 이야기가 아니다.
압도적 정보량과 의도적 편집을 통해 정교하게 갈고닦은 세련된 이야기는 단숨에 대화의 주도권을 청자(聽者)에서 화자(話者)로 옮겨 놓고 그 역할도 매스 미디어라는 화자(話者)가 탄생한 이래 대중이라는 청자에게 넘겨준 일이 없다.
즉 한번 화자(話者)는 영원한 화자(話者) 요 한번 청자(聽者)는 영원한 청자(聽者)가 된 셈이다. 이러한 압도적이고 고착화된 화자(話者 ) 덕분에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세뇌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경청은 우리의 일상이 된 게 아닌가? 하루라도 매스미디어라는 화자(話者)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낙오자가 되지는 않는 건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일 수 없지는 않은지? 늘 노심초사하며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매스미디어라는 화자(話者) 앞에 다소곳이 앉아 경청하는 청자(聽者)가 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매스미디어 앞에 있다가 가끔 우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한다. 압도적 화자(話者) 앞에서 더 이상 청자(聽者)만으로 있기 싫다는 반증이지만 매스미디어라는 압도적 화자(話者)이야말로 귀가 없는 경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화의 상대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부작용이 개인 간의 대화에서 경청이라는 대화의 중요한 덕목을 우리들에게 앗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의 매스미디어라는 압도적 화자를 만나 피할 수 없는 경청에 지친 우리는 사람이라는 만만한 대화 상대와 만나면 그동안 못했던 화자(話者)의 역할로 재빨리 복귀한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그 역할을 내어놓을 뜻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개인 간의 대화에서 청자(聽者)는 사라지고 모두가 화자인 대화의 장에서 경청이라는 미덕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어진다.
매스미디어는 이제 보는 것을 더해 우리를 청자(聽者)에서 시청자로 만들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화자가 자꾸 최신무기를 장착했고 그 지위를 공고히 하여 우리를 압박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압박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그러나 경청과 나아가 주시를 못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눈을 응시하고 귀를 쫑긋 하는 사람이라는 대화의 상대를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으로 스스로를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고 있는지 화자의 수사학이 아무리 화려하고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청자의 마음이 닫혀 심리학이 작동하지 않으면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도 의미도 없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