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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May 13. 2024

곡학아세, 양손의 떡을 넘어 탐욕 가득한 꽃놀이 패까지



2024.05.13

 배움이란 무엇일까? 아니 배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공자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라고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하면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때를 맞춰 시의적절하게 익히는 능력을 강조했다.

그러면 때에 맞춰 익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 의미를 알려면 배움이라는 의미부터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후성유전학에 따르면  유형성숙된 우리 인류는 배움을 통해 여백을 채우는 진화의 경로에 따라 육체는 수명의 6분1 정도 연령이 되면 성장이 멈추지만 정신은 수명을 다할 때까지 배움의 의지가 있는 한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평생에 걸쳐 배움의 끈을 놓치려 하지 않고 좋아 보이는 그 무언가를 향해 그랬으면 하는 욕망을 투사하기도 하고 앞서간 인물을 흉내 내며 연기도 하는 배우가 되어 배우는 것이다.

이 여백을 채우는 배움은 무작정 모방하고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중심을 잡고 편향된 게 없는지 살펴보고 바로잡아 익히는 것이 배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함을 공자님께서는 알고 경계하라는 의미로 논어의 첫 구절로 말씀하신 것이다.

곡학아세, 여기에도 배울 학이 들어간다.


그런데 어째 직학이 아니라 곡학이다. 배움에는 반드시 겸손이 따른다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은 자기의 부족함을 통렬히 느끼고 겸허히 자기의 전부를 내어놓는 과정이다. 즉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일단 직접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말을 말 그대로 배우는 직학이어야 하지 선입관과 과거의 찌꺼기를 잔뜩 안고 무슨 파당을 나누는 행위야 말로 곡학의 전형적인 예이다. 곡학은 직학에 비해 배움의 근본을 훼손하는 행위다. 곡학으로 배우면 세상은 온통 한 가지 색깔로 보인다. 이 곡학은 반드시 다음 단계인 아세를 수반한다. 즉 세상에 아부하여 자기의 사익을 추구하는 작게는 한 사람에게 사기 치는  모리배에서부터 크게는 세상사람들을 기만하고 선동하여 구덩이를 파놓고 대중을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자신은 자신의 사익을 최대한 빼먹고 공동체 전체를 온통 분탕질 쳐놓고 공동체가 돌아가야 할 다리마저 불살라 놓고 유유히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일종의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이 다분한 사람들이다.

이 곡학아세의 부류의 특징은 배움의 겸손함이 없이 이념이나 사상을 교묘히 비틀어 배움을 가장한 비판과 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세상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세상의 구조적 흠결을 들추어내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기만과 뒤집어 씌우기를 다반사로 하면서 그 세상의 구조적인 병폐가 마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잘못인양 대대적으로 선동함으로써 침묵하는 다수들에게 행동이 아닌 입으로써 아부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는 왜 이러한 무리의 선동에 취약한 것인가?


아마 우리 공동체에 존재하는 생략과 비약이 우리 공동체의 수준에 비추어 보면 어마 어마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물질적 풍요던 정신의 고양이던 모든 것은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 구성원들의 피와 땀의 결과를 지금의 우리가 누리고 겪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가 근 삼백 년에 걸쳐 이루어낸 결실을 우리는 불과 한세대에 걸쳐 달성했으니 그 과정에서 생략된 무언가가 얼마나 많으며 허점은 부지기수일 것이다.

이 생략과 허점은 압축성장을 한 우리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며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 과거로 돌아가 그러면 절대 안 되었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소리 높이는 무리들의 진정성을 우리는 의심하고 그 진위를 따져 선사 후공의 무리가 혹시 공동체에서 곡학아세를 넘어 혹세무민 하지 않는지 늘 경계해야 하는 사회가 압축성장을 한 우리 공동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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