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4
모순덩어리인 우리 인간이 풍요롭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항산항심이라는 말이 이럴 때 적합할까? 또 항산항심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인생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는 겸손을 배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말 타면 경마 잡고 싶다고 항심이 아니고 욕심이 발동되면 우리 눈에는 그야말로 보이는 게 없게 된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욕망의 에스컬레이터는 마치 에스컬레이터 계단의 무한궤도가 멈추지 않고 도는 것처럼 도무지 만족을 모르고 돌고 또 도는 것이다.
한계가 없는 욕망처럼 파괴적이고 부질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듣고 배워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또 거기까지 가본 사람은 드물고 드물다. 우리 몸의 세포가 다른 세포의 영역을 침범할 수없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산다. 즉 일상이 제어받고 제어하며 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 한계를 지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욕심을 제어하고 항심이 되는 전제인 항산은 어떻게 해석해야 마음의 평화를 얻을까? 맹자 이래 주자까지 군왕은 모름지기 백성으로 하여금 먹고살 직업이나 재화를 생산하게 하여 백성의 생활을 여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이라 설파하고 특히 맹자는 유교적 학문을 연마한 선비만은 항산항심의 예외적 인물로 규정했고, 선비만이 항산 없이 항심을 가질 수 있는 유교국가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모두가 초인이 될 수 없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시험에 들게 말고 늘 일용할 양식을 벌어 일상이 잔잔한 호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좋겠지만 인생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듯이 항산이라는 돌부리를 차고 일어나 풍요라고 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쭉 달려간다. 그 끝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양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맹목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모습이 우리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 아닐까? 누구는 꼬꾸라져서 엎어지기도 하였고 누구는 갖가지 어려움을 물리치고 풍요라는 월계관을 쓰기도 했지만 풍요 후의 밀려드는 알 수 없는 공허감속에서 극단의 빈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빈곤의 정체에 대해서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가리키듯 춘하추동, 전후좌우, 동서남북의 사방을 볼 수 있는모순적 존재인 동시에 전인적 존재다. 태어나면서 세상이 심어준 가치관에 따라 열심히 살았지만 그 가치관이 사람이 살아야 할 춘하추동, 전후좌우, 동서남북을 살피면서 이루어낸 풍요가 아닌 것이다. 대개는 돈으로 표현되는 화폐경제 속에서 돈만으로 이루어낸 풍요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 풍요는 우리에게 풍요의 모습으로 다가온 또 다른 빈곤인지도 모른다.
돈으로 지칭되는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풍요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앗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돈과 맞바꾼 수많은 시간 안에 잠자고 있었던 우리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이루 셀 수없이 많겠지만 분명한 것은 항산이 아닌 욕망의 화신인 재물보다는 우리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빈곤 속의 풍요라는 어렴풋한 옛 추억이 돈과 맞바꾼 시간 속에 잠들고 있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풍요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