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3
올해 백수에 접어드신 장인어른을 모시고 녹음이 짙어지는 교외로 차를 가지고 드라이브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선하다'라고 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라고 하는 것은 놀랍고도 신비한 일이며 우주적 무게에 필적할 만한 사실임에도 흔하고 자주 목격 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존재는 깃털 마냥 가볍게 인식되는 대상으로 평가절하 받는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나오는 햄릿의 독백을 번역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해석되지만 이 말은 더 구체적으로 번역하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산다는 것은 곧바로 존재의 문제로 치환되고 아우그스티누스의 말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한 것이 되는 이치이다.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며 그 인간 중에서도 나이 들어 어렵게 얻은 아들은 그야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귀한 존재인 아들을 나이 든 아버지가 직접 훈육할 때 생기는 부작용을 염려하여 어린 아들을 아버지가 가장 믿고 교유하는 친구에게 맡겨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전통이 있는 것을 보면 귀한 존재를 대하는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의 시작은 사랑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나타난다. 대뜸 욕부터 하고 나타나는 존재를 만나고서도 경계나 주의를 게을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선의나 호의로 다가오는 존재를 만나면 우리는 경계와 주의를 풀고 해이해지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린 자식을 양육하는 태도도 너무 사랑하면 잘하려고 하고 잘하려다 보면 좋은 것을 권하게 되고 좋은 것을 권하다 보면 잔소리가 반복되어 자식은 반항심이 싹트고 사사건건 부자간에 부딪히게 되어 앙금을 남기며 결국에는 관계가 파탄이 나는 것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 선하다. 선한 존재에게 더 선하라고 하는 것은 선에 선을 더하는 책선이다. 책선이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반복되면 선의와 호의에서 비롯된 모든 노력과 행위들을 한 순간에 날린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이미 선하다. 어쩌면 선한 존재이므로 유한한 수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존재로서 이미 선한 존재인 우리에게 계속 선하라고 책선 하는 행위는 유한한 삶을 빨리 끝내라고 종용하고 부채질하는 행위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존재로서 선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더 선하라고 권하는 책선이 아니라 세상의 풍파로부터 나를 지켜줄 악하고 독한 방어막이 더 요긴할 것이다.
그러므로 양약은 고구언이나 이어병이요 충언은 역이 이나 이어행이라는 말과 같이 사랑과 호의를 앞세워 다가오는 자들의 교언영색은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려는 존재로서 선한 우리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해악만 끼칠 따름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반전과 역설이 교차되는 리드미컬한 공간이다. 이 공간을 주무대로 삼아 시간을 타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선한 존재인 우리는 선과 악이 교차되는 리듬을 가져야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를 하루하루 극복하면서 살 수 있는 선한 존재이면서 악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운명과 숙명을 가진 존재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로서 선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에 다가서서 이해를 통해 존재 그 자체로서 우리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