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과 독립운동, 광복과 해방공간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백년전쟁의 진행은 일제라는 거악이 물러나고 태평양 전쟁을 통해 4년간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하여 남한에 진주한 미국과 1945년 8월 9일 대일 선전포고 후 단 6일 만에 북한을 접수한 소련 모두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전승국의 패권질서라는 관점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반도의 허리가 북위 38도선이라고 하는 지리적 스케일로 잘린 원인이 같은 연합국, 미국과 소련에 의한 일본군 무장해제의 방편으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라는 거악의 질서가 사라지고 미소가 공유했던 적국, 일제의 무장해제를 완성해 가면서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서로를 파트너가 아닌 라이벌로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 두 강대국이 조우했던 공간이 패전국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의 허리가 됨으로써 망국에서 비롯된 한반도 백년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세계 패권질서가 맞붙는 확전이 되어 패망한 일본이 빠지고 미소가 개입되면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열되고 열강의 대리전이 되어가는 해방공간으로 무르익고 있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독립전쟁을 마무리하고 식민지 한반도에서 일제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를 심판하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은 하늘을 찔렀지만 태어나 보니 일제의 이등신민이 되어버린 망국의 백성들의 생존분투기가 그대로 부역의 멍에로 둔갑되기 쉬운 해방공간의 뒤숭숭함은 거악의 질서가 사라진 뒤 따라오는 차악의 혼돈쯤이었을 것이다.
1945년 10월 20일 연합군 환영식에서 중앙청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30년 만의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박사 옆에 나란히 자리 잡은 군정사령관 하지중장과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의 모습에서 미완의 독립전쟁을 이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불안한 그림자가 엿보였다.
1945년 11월 23일 중경에서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록 개인자격으로 27년 만에 환국하였지만 김구주석은 11월 28일 김규식 이시형 유동렬 엄항섭 등의 임정요인과 함께 우이동 손병희묘소와 망우리 안창호 묘소를 참배함으로써 순국선열들에게 광복을 알렸다.
해방공간에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과 고문을 당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여운형을 비롯한 국내파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흘러나왔다. 민족통일전선은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를 구성하여 민족반역자를 소탕하려는 통일전선 독립촉성대회를 시작으로 해방공간에서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집단은 좌익이었으며 그들은 1930년대부터 박헌영 이현상 김삼용 이주하와 함께 결성된 경성 콤 그룹을 모태로 한 인민위원회, 전국농민조합 총 연맹, 전국부녀 총연맹을 결성하여 1945년 11월 20일 천도교강당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의장 허헌을 중심으로 친일파 소탕을 의결하고 12월 8일 전농 백용희의장 주도하에 농민이 중심이 되는 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논의했으며 12월 21일 휘문중강당에서는 신간회 여성핵심멤버이자 산부인과 의사이며 후에 월북한 전국부녀 총 연맹의장 유영준에 의해 여권신장 및 여성참정권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하기도 했다.
해방공간 안에서 서울은 일종의 해방구답게 사십 년 만에 해방된 조국에 어떤 체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라고 하는 희망찬 설계를 하는 동안 일제의 이등신민으로서 태어난 1908년 1월생 식민지 청년은 어느새 장년이 되어 광복을 보고 1908년 6월에 태어나고 1932년 상해에서 25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한 동갑내기 윤봉길의사 몫까지 최선을 다해 자강하고 실력을 키워나갔으며 이제 광복된 조국에 초석을 닦고자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광복의 기쁨도 해방의 자유도 망국 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이천오백만 민족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는 미치지 못했다.
모두가 희망에 들떠 해방공간에서 저마다 나름대로의 미래를 설계하는 1945년이 저물 무렵인 12월 28일 전승국 미국과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에서 전후세계질서를 논의하면서 한국에 관해서는 ①한국에 민주임시정부 수립 ②한국의 임시정부 수립 및 제반 현안을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며, 미소공동위원회는 이를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 ③한국 임시정부와 협의 후 미국·소련·영국·중국 4개국 공동의 최대 5년의 신탁통치 실시가 합의되었다는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의 하나였으며, 한국에 관한 문제 역시 그 일부로 다루어졌지만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운동이 벌어졌으며 좌우를 넘어 반탁운동으로 일치단결하는 모양새를 잠시 보이기도 하였다.
격동의 해방공간에서의 1945년도 한 해는 한반도를 사는 한민족에게는 절대로 망할 것 같지 않았던 거악의 일제패망을 눈으로 확인하고 새로운 패권질서인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하여 진주하였으며 지루한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목표로 희망에 들뜨고 외세에 저항하여 좌우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던 한반도 백년전쟁의 역사에서 어쩌면 기적의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