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은 사십 년 뜨거운 피 엉킨 자취니
길이길이 빛내리 길이길이 빛내리~~
1949년에 공모를 통해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으로 탄생한 ‘광복절 노래’다.
고통이 해소되고 찾아든 기쁨은 그 이전 받았던 고통의 크기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광복의 기쁨은 누군가에게는 처절한 기쁨으로 눈물을 흘리며 광복의 노래를 불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부귀영화와 일상의 질서를 깨는 형태로 다가왔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용한다는 일왕의 항복 방송은 절대로 올 것 같지 않던 광복의 그날이 드디어 우리 눈앞에서 실현된 것이었다.
백인백색의 역할과 모습으로 광복의 그날을 마주했던 이천오백만 동포들의 뇌리에는 마치 죽어가는 자가 임종직전 아주 짧은 시간에 자기의 전생을 파노라마로 보는 느낌이었을까? 식민지 조선의 이등신민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1908년 1월에 태어난 청년이 마흔을 바라보는 장년이 되는 사이 1908년 6월에 태어난 또 다른 식민지 조선의 청년은 독립전쟁에 제 한 몸 불살라 1932년 이십 대에 장렬히 순국했다.
살아남은 장년의 1908년 1월생도 순국한 꽃다운 청년의 1908년 6월생도 죄罪없이 살았고 죄罪없이 죽었다. 죽지 않은 것이 죄罪라면 1908년 1월생은 죄罪를 지은 것이고 1908년 6월생은 죄罪를 짓지 않은 것이 된다.
이처럼 광복의 그날은 자의든 타의든 이천오백만 한민족을 독립운동 아니 독립전쟁보다도 더 복잡 다난한 체제 전쟁으로 우리 민족을 몰아넣고 있었다.
일제라고 하는 거악의 질서가 사라지고 난 다음 정의와 평화가 올 것 같은 희망회로는 아마 1945년 8월 15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의 환한 얼굴에서 그날 하루만은 뭉게뭉게 피워 올랐지만 사십 년간 철옹성처럼 한민족을 옥죄었던 일제를 우리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원죄原罪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망국의 그날 싸우지 못하고 혼군과 을사오적에 의해 어어 하면서 나라를 내어준 원죄原罪와 판박이로 다가오는 역사의 평행이론 앞에서 우리 모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역사의 평행이론으로 잉태된 해방정국의 원죄는 분열의 씨앗으로 한반도를 남북으로 갈라놓았던 것도 모자라 좌우로 찢어 놓았으며 그 갈등과 분열의 시발점이 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인하여 남북한은 망국에 이어 분단이라고 하는 역사의 멍에를 이고 건국을 해야만 하는 이중 삼중의 난도 높은 문제 앞에 홀로 서있어야 했던 것이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듯이 망국의 상황하에서 활로를 찾던 백인백색의 일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의 고군분투기는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느냐 만은 일제라고 하는 거악의 질서가 사라지고 난 다음 들어선 해방정국의 패러다임은 변신과 배신 위장과 비난이 난무하는 혼돈의 칼춤이 지배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남한에서는 오키나와에서 출발하여 서울에 입성한 하지중장이라고 하는 정치경험이 전무한 보병야전군 사령관의 어깨 위에 질서유지의 책임이 주어졌고, 북한에서는 코민테른이라고 하는 국제공산당 조직으로 단련된 북한을 점령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이반 치스차코프(Ivan Mikhailovich Chistyakov, 1900~1979)가 북한 점령 후인 1945년 8월 25일 북한 주민을 대상으로 발표한 첫 포고문으로 시작된 신속하고 조직적인 북한 접수가 시작되었다.
광복의 그날 바라본 한반도 강토의 흙은 다시 만져봐도 그 흙이고, 바다마저 덩실덩실 파도가 춤을 추는 듯 남녀노소가 기뻐했지만 사십 년 동안 광복을 위해 싸웠던 순국선열들의 엉킨 피 자취로써는 도무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전후질서라고 하는 파고를 헤쳐나가기도 광복의 기쁨을 길이길이 빛내기에도 여러모로 역부족이었음을 실감했던 광복의 그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