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섭리나 세상의 원리가 두루 공유하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변화의 모습은 모이면 흩어지고 흩어지면 모이는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섭리와 원리가 교차하는 희비쌍곡선의 포물선이 그리는 공간 안에서 인간의 희로애락 오욕칠정이 표현되고 녹아있는 자연과 세상 안에 우리는 살고 있다.
1946년 1월의 해방정국은 불혹을 바라보는 1908년 1월생의 눈에는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망국의 한을 비수처럼 가슴에 품고 신학문을 배우고 익혀 반일을 넘어 극일 하고자 일제의 심장부, 제국대학에 들어가 조선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차별과 모욕 속에서도 1908년 6월생이 독립전쟁에서 당랑거철의 각오로 산화해 간 동갑내기 몫까지 살아서 망국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독립과 건국의 인재가 되고자 다짐했던 수십 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광복이라는 해방공간에서 무수하게 들었던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이 다시 일어나니 조선은 조심하여라는 말은 엄혹한 국제패권질서에서 자강 하지 못하고 분열된 나라가 맞이해야 할 엄혹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구이다. 더구나 세계 초강대국들이 쟁패하는 한반도에서 자강 하지도 단합하지도 못하는 나라의 미래는 일러 무삼 할 뿐이다.
일제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광기에 가까운 군국주의로 달려가면서 전시경제를 통해 한반도를 샅샅이 수탈하고 창씨개명으로 한민족의 얼과 정신을 말살했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태평양 전쟁 시기 망국의 백성으로 태어난 학생들이 총알받이로 전선에 끌려가는 참상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제 한 몸 지키기도 어려운 광기의 제2차 세계대전 말 대학강단을 도망치다시피 떠났던 1908년 1월생의 눈에 비친 해방공간은 일생일대의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망국 이후 사십 년 독립전쟁의 전사에서 백인백색의 분열의 역사를 반복했던 독립전쟁은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광복이라는 일말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하여 1942년 김구주석의 주도하에 김두봉 김원봉과 같은 화북지역 좌익무장단체와 힘을 합쳐 광복군 창설을 도모하면서 드디어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광복군의 국내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본 군국주의가 미군의 원자폭탄 두발과 소련군 참전으로 불현듯 찾아온 해방공간에서 좌우가 합작된 광복군의 지분도 역할도 없이 미소 간의 세계패권질서라는 역사의 수레바퀴만이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래도 사십 년 만에 맛본 광복의 환희와 달콤함으로 1945년은 쏜 살 같이 저물고 있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보도되자 해방정국의 좌우익 모두 한 목소리로 이를 규탄하고 이듬해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거국적 반탁군중집회를 열었으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홍남표 박헌영 등 좌익이 반탁합의를 뒤집고 친탁으로 선회하면서 좌익과 우익 간의 기적과도 같았던 짧았던 밀월관계는 소련의 극동정책, 즉 스탈린이 지령한 한반도에 사회주의 공산기지 건설목표에 의해 친탁과 반탁이라는 어젠다 아래서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다.
1946년 1월 14일 중앙청 최초 태극기 게양식이 때마침 방한한 패터슨 미육군장관 참관하에 진행되었고 그 후 기자회견을 통해 미 군정하의 조선의 지위를 재확인해주었으며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따라 미소공동위 예비회담이 1946년 1월 16일에 미국 측 하지중장 아널드소장 외 7명, 소련 측 스티코프중장 외 6명이 참가하여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고 뒤이어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 본회담이 열렸으나 미소 간의 입장차이만 확인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1946년의 해방공간은 본격적으로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이 한반도를 조여들어 왔으며 그에 따라 좌우합작이라는 한반도 백년전쟁의 기적의 순간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면서 일사불란하게 스탈린의 사주를 받고 질서를 구축해 나간 스티코프 장군의 북한과 해방정국에 난립했던 수많은 정당, 그중에서도 스티코프의 마리오네트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던 남로당의 박헌영이 월북하고 본격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사주했던 9월 총파업과 비극적인 10월 대구폭동이라는 전대미문의 내전을 일으키며 한반도 백년전쟁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선전포고를 예고하고 실행에 착수한 분열의 씨앗을 뿌린 해방공간 1946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