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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백년전쟁24,열전熱戰과 냉전冷戰1950

by 윤해


한반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분명하며 산이 많고 깊으며 횡심 보다는 종심이 긴 징이 있다

전쟁은 개전초기 기세로 밀어붙이는 열전의 양상으로 상대방을 수세로 몰다가 기세가 막히면 힘과 힘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교착점이 생기고 교착점이 연결되는 교착선을 사이에 두고 열전은 소강과 발광을 반복하는 교착국면에 진입한다.

교착국면은 총력전이다. 밀고 밀리는 시소와 같은 힘 겨루기를 반복하면서 충분한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삼간 속에서 저력의 카운터 블로를 적의 턱에 꽂아 넣는 측이 교착국면을 깨고 전세를 역전시키고 다시금 기세에 올라탄다. 기세에 올라탄 대부분의 군대는 기호지세가 되어간다. 즉 호랑이 위에 올라타서 내릴 수도 계속 달려갈 수도 없는 애매모호한 지경에서 내리고 달리는 결정권을 호랑이에게 빼앗기면 그 군대는 바로 호랑이굴로 끌려간다.

1950년 6월 25일 기세 좋게 남침한 북한군이 국군과 유엔군을 연파하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어붙이고 교착된 낙동강 전선에서 총력전으로 임한 국군과 유엔군은 피비린내 나는 한여름밤과 같은 열대야 속 열전熱戰을 버티어내고 한반도의 가을이 다가왔을 때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저력의 카운터 블로를 북한군의 턱에 꽂아 넣고 패주 하는 적을 쫓아 기호지세로 호랑이 등에 올라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내달려 나간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겨울이 성큼 다가올 무렵 중공군이 쳐놓은 매복에 걸려들어 낭림산맥과 적유령산맥에 둘러싸이고 개마고원이라는 호랑이굴로 꽁꽁 얼어붙은 장진호라는 최악의 장소 극악의 순간에 마침내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야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독일과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로 꼽히는 장진호전투는 미 해병 1사단 및 유엔군 3만여 명이 북한의 임시수도였던 강계를 점령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진격했다가 1950년 11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낮이 영하 20'C 밤에는 영하 30'c까지 떨어지는 강추위 속에서 중공군 7만여 명(전투병 6만 명 이상, 7개 사단) 에게 포위당하여 격전을 치르며 포위망을 뚫고 흥남부두까지 후퇴한 전투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개마고원은 해발고도가 1,200∼1,300m이며 1월 평균기온은 -15℃ 내외이고 최저 -40℃까지 내려가고 해발 1000m의 장진호는 겨울 낮이 영하 20'C 밤에는 영하 30'c까지 떨어지는 곳이다. 추위로 소총, 야포는 불발이 잦았고 사정거리도 짧아져 표적보다 위로 겨냥해야 했고 위생병은 모르핀 앰플을 얼지 않게 하려고 입속에 넣고 다녀야 했다.

진주만 이후 최대 패전이 된 장진호전투에서 2만 5천 명이 희생되었던 미군은 장진호전투에서 중공군에게 그 10배에 해당하는 타격을 입히며 돌파에 성공한 가장 위대한 후퇴작전이라 애써 위안했고 실제로 미군은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자신들도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중공군의 큰 자루전법口袋戰法에 말려든 미군은 장진호 전투와 함께 미군에 큰 희생을 남긴 전투로는 '군우리 전투'가 꼽힌다. 평안남도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통하는 계곡에서 미 육군 2사단과 터키군이 중공군으로부터 양쪽에서 협공을 받았던 전투였다.


1950년 11월 29일 중공군은 미 2사단 23 연대와 38 연대를 공격했고, 다음날 군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미 2사단은 도로에 병력이 모여 있는 가운데 중공군이 포위망을 좁히는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다. 철수를 하기 위해 '인디언 태형(笞刑·Gauntlet)'을 받는 듯한 불리한 여건에서 전투를 벌이며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디언 태형은 아메리칸 인디언이 양쪽에 두 줄로 늘어서 범법자를 지나가게 하며 두들겨 패는 형벌의 일종이다. 당시 무려 3000여 명이 전사·실종되거나 적의 포로가 됐다. 미군들은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협공을 받았던 길이 10㎞ 계곡을 '태형(笞刑)의 계곡'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미 육군 2사단은 군우리 전투에서 부대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후에 전투력을 복원해 1951년 2월 지평리에서 중공군에 대승을 거두며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막아내며 한국전쟁의 판세를 다시 한번 돌려놓았다.


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장진호와 군우리라는 호랑이굴에서 아무리 정신을 차려도 끊임없이 몰려오는 중공군이라는 파도에 마치 인해人海를 보는 착각을 미군들은 겪었지만 화력전력에서 절대 열세인 중공군에게 있어 구대전법의 전술적 승리는 개마고원의 산악지형에 무지하고 삼수갑산의 동장군을 무시한 미군의 오만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1950년 한국전쟁은 열전熱戰의 한여름도 지나고 냉전冷戰의 한겨울을 향하여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면서 민족적 동일체로서의 한반도를 이념과 혈맹의 동맹체로서의 한반도로 재편되어가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망국의 독립전쟁에서 전사하고 영면한 1908년 6월생 매헌과 같은 순국열사들에게는 지하에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는 민족 분열이었으며 1908년 1월생과 같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한민족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다가왔고 또다시 분단되는 한반도를 상상하면서 그해 겨울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또 다른 생사의 기로에 선 위기감에 몸서리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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