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전熱戰과 냉전冷戰이 교차하는 전시, 화합과 반목이 뒤섞여 돌아가는 평시 모두에 삶과 죽음의 짙은 그림자가 늘 어른거린다.
전쟁은 일상을 잡아먹고 평화는 일상에 잡아먹힌다. 지구가 온통 얼어붙는 빙하기에도 소빙하기 사이사이로 간빙기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생명이 살아갈 여지와 토대를 제공하듯이 아무리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생존과 일상은 죽음과 반목을 딛고 일어선다.
구대전법口袋戰法으로 무장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중공군과 삼수갑산三水甲山의 동장군冬將軍까지 미군은 미 해병전사에서 길이 남을 패전을 당하고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개마고원 장진호를 빠져나와 함흥평야를 가로질러 천신만고를 겪고 마침내 흥남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산이 중공군에게 점령되면서 육로 퇴로가 막힌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해상 철수 외에는 대안이 사라지자 12월 9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의 철수명령, 흥남철수작전이 개시됐다. 12월 11일 시작된 미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 탑재는 12월 14일 선적을 완료했다. 다음 날인 12월 15일 흥남부두에서 출항이 시작되었으며 철수를 위해 병력 10만 5000여 명과 차량 1만 7500대, 그리고 물자 35만 톤이 함경남도 흥남항에 집결했고 유엔군과 국군은 12월 24일까지 흥남철수를 마침내 완료한 군사작전이 흥남철수작전이다.
개별 인간도 위기나 불운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나듯이 군대도 패주 하는 적을 추격하는 전진의 기세보다도 적의 매복에 걸려 후퇴할 때 그 군대의 진면목과 저력이 드러난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전시의 소문은 쏜 화살보다 빠르게 전후방을 날아다닌다. 더구나 전선도 피아도 희미했던 최악의 패배 장진호전투를 치르고 눈보라가 휘날리고 바람이 귀를 때리는 흥남부두 미해군 함정에 승선한 미군의 눈앞에 나타난 하얀 옷을 입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10만 명 피난민들의 행렬과 집결은 그들의 눈을 의심케 하고 애써 외면하고 싶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백년전쟁이 늘 그렇듯이 자로 자를 수 있는 경계도 한 줄로 세울 수 있는 일사불란함도 대략 난망한 애매모호함과 카오스의 혼돈만이 전장에 흐르고 그 전장이라는 곳도 전방과 후방도 모호하며 적과 아군이라고 하는 피아의 구분도 애매한 한국전쟁은 특히 유엔군의 눈으로 보면 그저 카오스의 혼돈과 문명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미 제10 군단장 알몬드는 대규모 무기와 장비 운송으로 인해 피난민 수송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국군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통역의 집요한 설득으로 마지막 순간 피난민 탑승을 허락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적이라 할만한 이 피난민 수송작전은 배 한 척에 정원의 10배가 넘는 5000여 명이 승선하는 등 혼란 속에서 피난민 9만 1000여 명이 배를 탔다. 특히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피란민 4000여 명을 태우고 12월 23일 출발했다. 이 배에서는 아기 다섯 명이 태어나는 등 감동적인 순간도 있었다. 작전은 12월 24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항에 도착하면서 성공적으로 끝났다.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은 폭약 400톤과 장비 560만 톤을 흥남항에 남겨두고 해군 함대의 함포가 불을 뿜고 공군폭격기의 집중 사격으로 전략물자는 물론 흥남항에 있는 항만시설 모두를 중공군에게 아무런 전략적 자원도 남기지 않기 위하여 남김없이 폭파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대규모 육해공 합동작전으로, 병력 10만 명 이상과, 막대한 병기를 포기하면서까지도 피란민 10만 명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키며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력을 보존했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급박한 전쟁 중에서 물자보다는 사람을 우선했다는 희귀한 사례로서 세계전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한국전쟁과 이후 대한민국 번영에도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 민족의 대이동 흥남철수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1908년 1월생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좌절된 북진통일의 아쉬움보다 10만 명이라는 소중한 생명을 자유 대한민국의 품으로 무사히 귀환시킨 이름이 알려진 영웅뿐만 아니라 개마고원과 함흥평야에서 장렬히 싸우다 스러져간 이름 모를 영웅들의 모습에서 1908년 6월생 매헌과 같은 순국열사의 멸사봉공滅私奉公을 함께 떠올리면서 온몸이 숙연해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