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와 떠난 자 행동한 자와 행동하지 않은 자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가 on, off를 기본으로 go, stop을 반복하는 명멸明滅과 행동거지行動擧止로 이루어져 있듯이 46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나도 세포의 명멸明滅과 행동거지行動擧止에 따라 끊임없는 판단判斷을 강요받는다.
판단判斷의 사전적 의미는 형식논리학상形式論理學上 주사主辭와 빈사賓辭와의 종합綜合이며 이 판단判斷이 집합集合하여 추리推理가 된다. 따라서 판단判斷은 개념槪念과 추리推理의 중간中間에 있는 작용作用이고, 이것을 언어言語로 표시表示하면 명제命題가 된다라고 꽤 복잡한 정의를 내리고 있으나 판단判斷을 한마디로 말하면 단정斷定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당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서 C(Choice)를 하고 산다는 말이 가장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950년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들만큼 이 말이 주는 무게를 뼈저리게 겪은 사람들도 흔치 않았을 것이다. 망국의 일제치하, 소련군 점령하의 인공치하, 북한군 점령하의 인공치하, 미군정하의 해방공간, 유엔군 점령하의 북한, 어쩌면 일제 패망에서부터 6.25 전쟁으로 달려간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역설적으로 체제 시험장이 되어 허상의 이념을 실상의 현실로 생생히 체험하게 한 것은 물론이고 생사가 갈라지는 병사가 마주하는 전장의 상황이 전후방 남북한 전 국토에 걸쳐 종심을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리면서 생사기로에 놓인 삼천만 동포들의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고 판단은 단호해갔다.
보다 일찍 공산당 치하를 경험한 북한농민들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내세운 볼셰비키들의 허구를 농지에 매여 5년간 겪었고, 일제가 만주와 대륙을 도모하기 위해 건설했던 공업시설이 견고했던 북한에서 일찍이 상공업에 투신했던 기업가들은 재빨리 공산당의 속성을 알아차리고 해방공간의 남한으로 38선을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넘어가 기꺼이 한 끗 발의 38 따라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위기가 기회이듯이 전쟁의 고통은 평화가 주는 안락감을 제거해 갔지만 1908년 1월생을 비롯한 망국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고 있었던 6.25 전쟁의 고통은 1908년 6월생 매헌이 그토록 염원하고 희생하며 가지려 했던 번영된 조국의 광복과 건국 그리고 번영까지 이룰 대한민국의 탄생을 위한 산고의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종심縱深으로 승강昇降했던 6.25 전쟁의 전황은 농민들에게는 공산당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보다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단행한 이승만의 농지개혁의 승리로 끝났고 자본가 지주를 비롯한 수많은 북한주민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가치를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전쟁통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겪고 학습함으로써 번영된 대한민국의 초석이 소프트 파워가 되어 서서히 파종된 시기가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가 된 6.25 전쟁 시기였다.
그러나 이도저도 몰랐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오로지 생존게임 속으로 들어갔던 유엔군 치하 북한 민초들의 생존방식은 분산이었다. 부모와 자식을 나누고 자식들을 또다시 나눠서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최선의 경우의 수를 찾는 처절한 생존게임의 마지막 승자가 굳세어라 금순아로 대표되는 눈보라가 휘날리고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활로를 개척하려던 북한의 민초들은 어디서 뜬 구름처럼 떠도는 흥남항으로 가면 살길이 있다는 소문하나 달랑 믿고 정든 땅 정든 형제 정든 부모를 두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하며 차디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흥남부두로 파도치듯 밀리고 밀려 마침내 북한이라는 지옥을 탈출하고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된 것이다.
서해안 인천으로 상륙하고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한 유엔군과 국군은 비록 천년의 적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고 장진호와 태형의 계곡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들이 뿌린 피가 북한을 적시며 북한 동포의 가슴에 타올라 동해안 흥남부두로 달려간 북한의 수많은 굳세워라 금순이들을 탈출시킨 한민족의 대서사 흥남철수작전이야말로 동서남북 종횡무진縱橫無盡했던 미완의 통일전쟁, 6.25 전쟁의 최대수확이자 남북한 체제경쟁을 넘어 동서냉전이라는 세계사적 경쟁에서 먼 훗날 최종적 승리를 가져오게 한 귀중한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