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장수를 바꾸는 행동이야말로 적전분열이며 지휘체계의 혼란을 가져와 전쟁의 승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궁극적으로 나라의 멸망을 재촉하는 자살골이다.
그러나 거친 외교의 현장, 전쟁 중에서도 정치는 생물처럼 돌아가며 전쟁의 향방에 따른 사리사욕이 꿈틀대는 경우도 전쟁의 역사에서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전쟁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야 하는 총력전이다. 그 총력전의 와중에서 정치를 하는 군주와 전쟁을 치르는 장수는 입장과 처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누란의 위기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낸 수많은 명장들이 적에게 죽기보다 아군의 손에 잡혀 목숨 걸고 지켜낸 혼군의 감옥에서 고초를 겪거나 옥사하는 반복되는 비극은 서사를 만들어 내고 그 서사는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 패한 명장의 안타까움에 더해 미욱한 혼군에게로 온갖 비난의 화살이 역사의 심판정을 도배한다.
그러나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는 전쟁의 금과옥조처럼 명장을 날려버린 혼군의 실책도 명장을 대신해서 들어온 핀치 히터, 대타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혼군이 명군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1908년 1월생과 같이 통일되고 번영된 조국을 꿈꾸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버팀목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해임되고 릿지웨이가 유엔군 사령관 겸 극동군 사령관에 취임하고 공석이 된 미 8군 사령관에 1892년생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으로 날아와 실제적인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밴플리트장군을 부르는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수식어 한마디가 그가 얼마나 한국을 사랑한 장군이었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전쟁에서 제한전이라는 정치를 한 트루먼도 트루먼이 보낸 장군들을 데리고 북진통일을 넘어 대륙을 경략하며 공산주의자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비전을 제시한 우남도 비록 전장의 장수는 맥아더에서 릿지웨이로 워커에서 밴플리트로 바뀌었지만 레귤러 멤버든 핀치히터든 가리지 않고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의 의미를 미국의 장군들에게 분명하게 심어주고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가 향후 미국의 패권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각인시킨 우남의 외교력이 빛을 발하여 한국전쟁의 승패와 결과에 무관하게 한국과 미국은 진정한 혈맹으로서 저변을 깔고 있었다.
새로 온 장수 밴플리트의 전투 수행의지를 시험하듯이 중공군과 북한군은 4월과 5월의 총공세를 통해 서울을 재침하기 위해 수십만 대군을 보냈지만 밴 플리트는 광화문에서 마포 한강변까지 야포 400문을 배치해 놓고 송추로 침입해 오는 중공군에게 밤낮으로 화력을 집중시켜 다시는 수도 서울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적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내었다. 이후 밴플리트는 평양 원산을 확보하는 39선으로 적을 몰아붙였지만 트루만의 제한전, 펜타곤과 극동사령부의 만류로 압도적 화력을 통한 승기를 제지당하고 일진일퇴의 지루한 고지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공군 조종사인 외아들을 한국전에서 잃은 밴플리트 장군의 희생과 헌신은 전쟁을 통하여 한국군의 체질을 현대화한 육군사관학교 4년제 설립, 육군 20개 사단 증편, 광주 포병학교 창설과 교육사령부설치 및 국군장교의 미국 군사학교 유학 등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밴플리트는 한국이 제2의 조국이 된 듯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한국인에게는 맥아더를 대신한 위대한 대타, 즉 핀치 히터 Pinch Hitter 말 그대로 위기를 타개한 장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