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통해 한국군의 아버지이자 역설적이게도 중공군의 현대전 교수가 되어버린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가장 쉬운 전투는 퇴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섬멸전이고 가장 어려운 전투는 갱도식 방어 진지에 틀어 박혀 저항하는 적을 끌어내는 전투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파로호 전투破虜湖 戰鬪는 1951년 5월 26일부터 5월 28일까지 중국인민지원군, 조선인민군 연합군과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이 강원도 화천군 화천호 일대에서 벌인 전투이다. 춘계공세의 일환이었던 용문산 전투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이 큰 피해를 입은 후 후퇴를 시작하자, 대한민국 제6사단의 장도영 준장은 후퇴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쫓아 용문산에서 약 73km 떨어진 화천댐 일대까지 중국인민지원군을 추격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화천호 일대에 고립되었고 미국 공군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제6사단은 중국인민지원군 제63군을 궤멸시켰다.
파로호 전투를 기점으로 중공군과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내고 퇴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려던 쉬운 전투는 미국의 제한전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이고 열흘 간의 골든타임을 워싱턴 수뇌부의 정치질에 날려버리고 미군과 국군은 갱도방어진지라고 하는 참호 속 적들을 하나하나 끌어내야 이기는 가장 어려운 전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펀치볼 전투, 피의 능선전투, 단장의 능선전투라고 하는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젊은 넋들이 숨져간 그때 그 자리에서 산화해 가는 고지전은 1952년 10월 6일 백마고지 전투까지 포연이 자욱한 펀치볼,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과 함께 흩뿌려진 피로 적셔진 능선까지 한국전쟁은 피아를 떠나 삽혈동맹(歃血同盟), 즉 혈맹끼리 전선을 굳건히 형성하며 젊은 피가 갈려나가는 소모전의 극치로 나아가고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로 양군 합계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 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 소비 전투이기도 했으며 국군은 겨우 1개 사단이 적 3개 사단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 있었지만, 대신 4배의 포탄을 퍼부어댄 것이 승리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국군의 또 다른 대승인 용문산 전투 이후 병력의 열세를 화력의 우세로 메꿀 수 있음을 또다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한국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날조하는 중공군의 공식전사에서 드물 정도로 한국군의 승리를 인정하는 전투이기도 했다.
백마고지는 원래 무명의 395 고지였으나 백마고지의 야간 전투 시 백마고지를 뒤덮은 수많은 낙하산 조명탄들이 터져서 내려오는 하얀 섬광을 영국 외신기자가 영국 옥스퍼드셔주의 벅셔 다운즈에 있는 Whitehorse Hill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사용했고 AP통신사, INS통신사 등을 통해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을 사용한 기사가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그리하여 'Los Angeles Times', 'Monroe Morning World' 등 미국 신문사들이 10월 7일 자 기사부터 'White Horse Hill'라는 명칭이 들어간 기사들을 재배포하면서 백마고지라는 공식적인 명칭에 이르렀다.
삽혈歃血은 굳은 약속의 표시로 백마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거나 입에 바르던 同盟의 의식이었다. 백마고지에서 자유진영이 함께 흘린 피는 삽혈동맹 歃血同盟이 되어 그 어떤 동맹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굳건한 혈맹血盟으로써 두고두고 전후 세계질서를 견인하였고 2025년 대한민국의 굳건한 반석이 되었음을 기억하는 국민은 드물지만 백마고지에서 펼쳐진 삽혈동맹歃血同盟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발전되었고 그렇게 국군과 미군은 전쟁의 참화를 전화위복轉禍爲福할 소중한 피를 백마고지에 적신 것이었다.
이처럼 한세대의 젊은이들이 갈려나갔던 1952년 10월의 비참했던 전선 상황은 암울했지만 1908년 1월생과 같은 이 땅의 교육자들은 비극에 절망하지 않고 한국전쟁 너머의 세상을 대비하기 위해 전장의 무명용사들이 삽혈동맹 歃血同盟으로 산화하며 지켜내고 있었던 한반도의 미래 꿈나무들을 멸사봉공滅私奉公하고 전화위복轉禍爲福하면서 길러내고 있었다.